Interview

김삼두 님

이름. 김삼두

일시. 2019년 9월 20일

장소. 남해읍 김삼두님 댁

참석자. 김삼두, 최승용(헤테로토피아 책임연구원), 서성경(헤테로토피아 연구보조원)

 

김삼두 :  그 당시 내가 자동차 정비를 하고 있었는데. 공사장에 온 자동차가 고장이 났어. 중장비. 그래가지고 고치주러 가니깐 고맙다고 자기들 홍보용으로 이 사진을 만들었던거야. 그러면서 그 당시 이렇게 해서 주더라고. 그때는 한국 기술진이 다리를 못 만들었어. 일본 기술진이 왔다니깐. 그래가지고 읍에 봉전이라는 곳이 있어. 그 집이 깨끔네 집이라고 했는데 이 아지매가 쓸고 닦고 하니깐. 재떨이 들고 따라다니니깐. 담뱃재 흘리면 막 닦고. 그 집 그 근방에서 일본인 기술자들이 먹고 자고 했다니깐. 

최승용 : 그러면 그 때 남해에서 차량 정비 일을 하셨어요?

김삼두 : 그 때 중장비가 공사하러 현장에 왔는데 그 때는 중장비가 참 귀하던 시절이지. 현대건설에서 했거든. 일본 기술자들이 와가지고 하고 그런데 가니깐 홍보 담당자인지 뭔지 모르겠어. 주더라고. 이 걸. 그 전에 남해군에서 사진 모으기 행사를 했었어. 그 때는 안했는데 뭐 큰 도움이 되겠나 싶어서. 근데 요번에 신문을 보고. 내가 이거 갖고 있으면 뭐하노.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싶어서 내가 전화를 했지.

최승용 : 남해각 휴게소를 이번에 군에서 샀죠. 거기를 남해 사람들 기억을 담은 전시관을 만들려고 하고 있는데 첫 번째 주제가 남해대교를 주제로 해서 거기에 얽힌 사연들 애환들 그런 걸 담는 전시관을 만들고 그 때 이런 사진들이 전시되고 기증 해주셨던 분들 개관식 때 다 초대하고.

김삼두 : 이게 남해대교가 73년도인가 개통이 됐으니깐. 이 사진은 70년도쯤 된다는 거고. 남해각은 해태그룹이 해서 해태동상도 있었어. 민간인한테 넘어갔지. 그 당시 남해각 유명했지. 그 때는 규모가 상당히 컸어. 남해에서는. 나이트클럽 술집도 있었고. 지하에. 위에는 상품 같은 것을 전시장 판매장, 식당도 있었고. 하여튼 그 지하에 술집이 나이트클럽이 유명했어. 읍에 사람들이 거기에 술 먹으로 가고. 택시타고 가고. 12시 이후에는 장사를 못하게 했거든. 그런데 남해각에 밴드 마스터가 남해경찰서 경비과장인가 그 사람의 아들이 했었어. 그러니깐 삭 이리 해가지고 12시 넘게까지 장사를 하고 뭐 그런 추억도 있고. 

최승용 : 남해에서는 거의 뭐 놀러가기에 좋은 곳이었네요.

김삼두 : 그 당시에는 도시 물 먹는 곳이 거기 밖에 없었잖아. 조명이 팍 들어오고 춤추고 노는 것이. 밴드가 연주하고. 한 번 갔다 오면 자랑삼아 남해각 가서 술 한 잔 먹었다 할 정도로 그러했어. 

최승용 : 남해대교가 그 당시에는 엄청난 관광지였나 봐요.

김삼두 : 독일 촌? 비교도 안 되지. 남해대교는 대한민국 전체의 전국명소. “남해대교 가봤나?”가 그기야. 

최승용 : 군 제대하고도 자동차 정비 일을 계속 하셨나요?

김삼두 : 아버지가 부산 밧데리라고 정비공장을 했다니깐. 남해읍에서 했지. 지금 이 자리. 집 짓기 전 에. 제대를 78년도에 했단 말이지. 한 2-3년. 직장 해가지고 부산으로 갔어. 그래서 부산에 계속 있다가 86년도에 이 집을 지으면서 남해로 내려왔지. 부산에 가면 생활이 좀 더 나아질까 싶어 갔지. 남해에 정비 일이 별로 돈이 안 돼. 

최승용 : 근데 왜 다시 남해로 돌아오셨어요. 

김삼두 :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유방암이 걸려서 수술했는데 그 때는 전이가 될지 안 될지 확실히 모르겠다고 5년이 지나봐야 알겠다고 하데. 부산에 사는 것도 좋지도 않고. 그 때 마침 옆집하고 같이 이 집을 같이 짓자는 제의가 왔어. 

최승용 : 선생님 아니셨으면 남해각을 해태가 지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김삼두 : 남해각에 대해서 잘 알고 싶으면 김태석씨라고 기획실장으로 있으셨던 분. 이야깃 거리가 있는지 모르지. 부산까지 8시간, 천신호라고 삼천포까지 가는 배도 있었고 여수서. 김태석씨 만나보면 잘 알지. 그 때 부산까지 8시간 남해대교가 개통하고 나서 부산까지 차로도 갈 수 있었는데, 버스를 싣고 건너갔구나. 도선이라고 해가지고. 노량에서 도선 배가 차를 실어다 건네줬지. 그 때는 고속도로도 없었을 때니깐 국도로 진주로 마산으로 해서 부산까지는 가는데 8시간. 배를 타고 가도 8시간 차를 타고 가도 8시간. 

그 다음 남해고속도로 생김으로 해가지고 4시간 반. 초창기에는 2차선 고속도로 였으니깐. 그러면 가다가 중간에 휴게소에서 쉬어가지고 점심 먹고 부산까지 가고. 그 다음에 4차선 도로가 생기고 나서부터 두 시간에서 두 시간 반. 

최승용 : 남해대교 이 전과 이 후는 완전히 다르겠네요. 

김삼두 : 아 다르지. 섬이 육지가 됐잖아. 굉장히 다르지. 굉장히 큰 선물. 대단한 국회의원. 우선 도선 할 필요가 없잖아. 언제든지 왔다 갔다 할 수 있고. 그 때는 도선 같은 거 안 움직이면 왔다갔다 못하잖아. 그러면 하동 노량에서 하룻밤 잔다거나 해서 친척집가거나 한 다음에 하루 지나 건너오고

최승용 : 남해 사람들에게 남해대교는 고마운 다리네요.

김삼두 : 최치환씨라고 국회의원이 있었거든. 그 분이 밑 작업을 해가지고 다리를 놓기로 했거든. 준공은 신동관 국회의원 할 때 했어. 최치환씨도 유능한 사람인데 지금도 남해군민들은 최고의 국회의원이라고 하잖아. 

최승용 : 그 노래도 있던데요. 최치환의 눈물다리 신동관의 출세다리

김삼두 : 최치환씨가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나왔거든. 공천을 못 받고. 그 때 연설할 때 하던 소리가 그 소리야. 그 때 최치환씨도 되고 신동관씨도 되고 그랬어. 

최승용 : 개통식 때 풍경은 기억나세요?

김삼두 : 나는 개통식 당일에는 안 갔거든. 복잡하고 힘드니깐. 근데 들은 이야기로는 박정희 대통령 와가지고 그렇게 하고 사람이 너무 많이 밀려오니깐 다리가 막 흔들흔들 해가지고 통제를 해야되나 말아야 되나 무섭다 어쩐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다리가 흔들흔들 해 그랬거든.” 다리에 사람이 빽빽이 줄지어 왔다 갔다 했으니깐. 그때는 대통령이 한 번 싹 지나가야 지나가게 했어. 고속도로도. 다리가 다 되어도 못 지나가게 했어. 다리가 있으니깐 버스를 타고 부산을 가보자 그래서. 남해대교가 세워져도 배는 한 동안 다녔지. 그 뒤에 좀 빠른 배가 고속정이 나왔는데 엔젤호라고. 배가 반쯤 떠가지고 가는. 버스보다는 좀 더 빠른 배가 있어야 하잖아. 근데 비싸서 안 타더라고. 

최승용 : 남해대교에 검문소가 있었잖아요? 거기서는 뭘 했던 거에요?

김삼두 : 노량 쪽에서 들어오면 검문소가 있었어. 그건 청원경찰이라 해야가지고 남해군에서 그 경찰관을 했어. 다리를 국가보안시설이라 해가지고 지키기 위해서. 청원경찰이라 그랬거든. 노량쪽에서 들어오면 검문소가 있었지. 

최승용 : 남해대교가 주황색 주탑인데 칠을 안 한 적도 있었다고 하던데요?

김삼두 : 남해군민들이 난리가 났어. 뵈기 싫다고. 국토관리청에 항의도 하고. 처음에 붉은색 저 색깔이었어. 그래서 원래대로 돌아온거지. 

최승용 : 그 당시 남해에서는 부산으로 많이 갔나봐요.

김삼두 : 그 때는 거의 80프로가 부산에 정착했지. 거의 대부분 부산으로 다 갔어. 부산 영도, 괴정. 두 집 세집 건너서 남해사람이라고 하는데. 부산 향우회는 얼마나 잘 되있는지 몰라. 

최승용 : 다시 돌아온 사람은 많지 않네요?

김삼두 : 없지. 나 같은 경우는 뭐 그렇고. 나가가지고는 거기서 기반 닦고 사는거야. 지금 뭐 남해 인구 얼마나 돼서. 향우는 35만 50만 된다는데 부산만 가지고. 그러니깐 부산시에서 무슨 시장이나 국회의원이나 구 의원 선거한다고 하면 남해 향우회와서 안하면 당선 안 된다고 하잖아. 그 만큼 사람이 많다고. 사하구나 괴정 그런데는 

최승용 : 일찍 돌아오셔서 고향을 지키고 계시네요?

김삼두 : 나는 형편이 그렇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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