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박용길 님

이름. 박용길

일시. 2019년 9월 20일

장소. 설천면 노량마을 대교건어물

참석자. 박용길, 최승용(헤테로토피아 책임연구원), 서성경(헤테로토피아 연구보조원)

 

박용길 : 남해각이 해태그룹 소속으로 그 당시에는 그 건물 입구에 해태상이 조각물이 양쪽에 세워져 있었거든. 그 당시 해태에서 남해각하고 임진각, 섬진강 휴게소 또 남강 휴게소 그때는 남강 휴게소도 있었거든. 그 때 해태그룹으로 소속이 되가지고 있었지. 외부에서 관광차들이 많이 오고 하니깐 주차공간이 없고 하니깐 안에 들어오고 싶어도 못들어오고 가는 차도 있었고 그때는 휴가철이나 주말에는 주차보는 사람이 두 명은 있었어요. 

최승용 : 사진업을 하는 사람이 그 당시에 몇 명이나 됐나요?

박용길 : 19명까지 있었고

최승용 : 사진을 찍은 다음에 어떻게 관광객에게 전달 했나요?

박용길 : 찍고나서 영수증을 기록해가지고 하나는 손님한테 주고 하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다가 영수증을 가지고 와서 집에다가 장부에다가 주소를 적어놓고. 혹시 영수증이 분실되면 사진을 보낼 수가 없잖아. 그래서 이중으로 주소를 적어놨지. 그래가지고 현상을 해서 그 주소대로 발송을 하는거지. 

최승용 : 현상에 걸리는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리나요?

박용길 : 칼라 같은 경우에는 사진을 촬영해가지고 진주 현상소로 보내면은 진주에서 오늘 보내면은 매일 같이 그때 왔다갔다 했거든요. 오전에 사진 찍은 걸 오후에 보내면은 빨리 나오면 뒷날. 물량이 많아가지고 밀릴 때는 이틀정도 걸리고. 그러면 우편 발송하고 하는 것 까지 하면 그 당시에는 우편발송이 삼일 걸렸거든요. 오래걸리면은 오일 정도 걸렸지. 

최승용 : 남해는 현상소가 없었나요?

박용길 : 흑백은 사진사들이 각자 현상을 해갖고 보내고 저녁되면 현상 해가지고 다음 날 아침에 우편으로 보냈지. 

최승용 : 그러면 이때 가격이 얼마였나요?

박용길 : 그 당시 흑백은 200원. 그 당시 우표해봐야. 등기로 하면은 30원인가 됐고 우표로 하면 10원인가 됐고. 칼라는 그 당시에 500원 600원. 그 당시에 여객선이 다녔거든. 여객선이 170원, 버스비가 270원 이던 시절이였어. 그 당시에 칼라가 귀했어요. 결혼식을 해도 거의 흑백으로 찍었어요. 70년대. 우리 결혼할 때도 결혼사진이 흑백이에요. 단체사진도 그 당시에는 칼라로 하면 부담이 많이 가니깐. 흑백으로 촬영해가지고. 

최승용 : 그러면 이때 사진업 하던 분들이 벌이가 괜찮다고 볼 수 있네요?

박용길 : 그 당시에 초창기에는 하루에 3-4만원 이었고, 칼라 사진 많이 찍고 할 때는 7-8만원. 괜찮았지. 호주머니 안에 동전 손님들 내주고 한다고 호주머니 안에 닳아져가지고 빵꾸가 다 나고. 

최승용 : 그것도 궁금한데 17명-19명이 사진사로 일했다고 하셨는데, 고객을 택시처럼 순번으로 선택받나요? 

박용길 : 그 당시에 단체로 오면 회장 총무가 있어요. 회장 총무를 먼저 기사한테 알아봐가지고 그 회장 총무한테 먼저 딱 만나면 사진촬영 성사가 되는거야. 그리고 단체로 와가지고 사진사들 많아도 또 배 타고 오는 분들도 있고 많아도 사진사들이 옆에 접근을 못한 사람들은 자기네들 음식 해가지고 광장에 앉아서 먹고 먹으면은 물을 식수를 떠다가 갖다주고 그 밥 다 먹을때까지 이야기 해주고 그 손님들 음식 해가지고 오면 같이 노나먹고 그렇게 해서 사진을 단체찍고 개인찍고 그랬지. 한 단체 와가지고 잘 찍으면 그 당시 단체 찍고 개인 찍고 하면은 한 2-3만원. 

최승용 : 그러면은 순번으로 한게 아니라 각자의 노력으로 섭외했다는 거네요?

박용길 : 그래가지고 나중에는 서로간의 경쟁이 너무 심해져서 합동으로 했어요. 그래가지고 각자 전부 사진 찍은 걸 계산을 해가지고 합동으로 해가지고 그 이익금을 분배 했어요. 그리 해야만이 서로 경쟁이 안 되고 내가 한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해서 얼마 이야기를 했는데 다른 사람이 내가 얼마 해줄게 해버리니깐. 그런데 합동으로 해버리니깐 그 전처럼 열심히 안해. 똑같이 갈라먹기 때문에. 그 대신에 나중에 다음에 쪼금 원칙을 바꿔가지고 매상을 많이 올린 사진사한테는 프로테이지를 좀 올려주고 그런 식으로 했어요. 그리해야만이 한 판이라도 더 찍을라고 노력을 하거든. 

최승용 : 사진사들 지역 출신은 어떻게 됐나요?

박용길 : 남해출신, 하동출신 이랬지. 하동쪽에서 나온 사진사들은 대교 중간에 저쪽편에 신노량쪽에. 그쪽에서 남해로 건너오면 따라와가지고 사진찍고 다시 저쪽으로 건너가고 그런식으로 했지. 남해 사람들은 노량쪽에 있었고. 하동 쪽에서는 저 건너 쪽에 방을 얻어가지고 자취하는 사진사들도 있었고. 

최승용 : 대교 위에 차들이 별로 안보이네요?

박용길 : 대교 개통할 그 무렵에는 차 200대 통과했지. 차가 많이 안 통과하니깐 사진사들끼리 차량 번호 가지고 내기도 하고 그랬어. 차량 번호 뒷자리가지고 숫자 높은 사람이 빵 사내기를 한다던지. 

최승용 : 사진사들이 유니폼을 입고 계시네요?

박용길 : 경상남도 관광협회라고 있었거든요. 손님들한테 쪼금 친근감이 들고 깨끗하게 보이도록 옷을 만들어서 명찰까지 다 차고 있었어. 

최승용 : 남해대교 개통식 때 참관 하셨어요?

박용길 : 하동 남해 이 쪽에서 대교 개통한다고 10만 이상된 인파가 몰렸으니깐. 상상도 못했지. 대교 개통 테이프 끊고 사람들이 걸어가는데 차단을 시켰다니깐. 대교가 사람이 너무 많이 들어서니깐 흔들려가지고 멀미를 할 정도로 흔들렸다니깐. 와이어 줄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그 당시에 대교 개통 이전에는 나룻배로 버스나 승용차 사람 태워가지고 실어다주고. 하동 노량으로 나룻배로 것너가 가지고 거기서 남해 노량으로 걸어왔어. 사람이 너무 많아가지고. 어마어마 했어 사람이. 박대통령은 보지는 못했고 저 건너편에 옛날에 초소가 하나 있었거든 그 옆에 노량대교 입구 쪽에 헬기장을 만들어 놨고. 거기로 헬기를 타고 와서 대교 여기까지 걸어와서 이쪽 보면 노량공원 쪽에 박대통령 와가지고 혹시 화장실 갈란지 모르기 때문에 간이 화장실을 우리가 같이 다른 사람들하고 만들었어. 개통 3일 앞두고 여기 경비도 한 3일 서봤거든요. 작업차량 이외에는. 구경 할 거라고 일반 손님들이 전부 한 번 걸어볼거라고 오는 걸 막고. 주간 경비팀, 야간 경비팀.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이쪽저쪽 양쪽으로 경비를 서고 그랬어요. 박대통령과 함께 최치환 의원, 신동관 의원 함께 왔고. 박대통령 오셔서 충렬사 들려서 기념식수도 하고 현판도 써주시고. 그 때 개통할 때 해군함정도 오고 그랬거든. 

최승용 : 남해각은 남해사람들이 한 번 놀고 싶을 때 오는 곳이였나요?

박용길 : 남해대교를 들어오면 관문인데다가 첫 장소니깐. 거기가 만남의 장소처럼. 거기서 만나자 그랬지. 해태에서 운영하다가 임대를 줬다가 매매를 했지. 

최승용 : 남해각과 노량마을이 점점점점 관광객이 줄어든 시점이 언제였을까요?

박용길 : 삼천포 창선 연륙교 생기면서. 그쪽에 교통량이 늘어나면서. 그쪽에도 나룻배가 실어 날랐었거든. 연륙교가 없었을 때는. 들고 나는 차량들이 남해대교로 왔는데 행락철 되면 연휴 때 이럴 때면 차가 진교쪽에서 들어오는 차. 하동쪽에서 들어오는 차가 붙어가지고 소통이 안될정도로 그랬지. 그래서 저쪽에 연륙교 생기면서 저쪽으로 다 빠져 버렸지. 남해대교 쪽으로 들어와서 삼천포 쪽으로 나가고. 그런식으로. 

최승용 : 노량대교까지 생겨서 노량마을은 더 침체되겠네요?

박용길 : 예전에는 사천휴게소가 없었거든. 전부 여기서 먹고 나가고 그랬거든. 

최승용 : 남해각에는 규모가 어떻게 되었나요?

박용길 : 남해각에 지배인 따로 있었고, 소장 따로 있었고, 지하 나이트클럽 별도로 있었고. 나이트클럽은 남해각이 직접 한 것이 아니고 임대를 줬고. 식당하고 모텔하고 하면서 종업원이 많을 때는 한 30명. 

최승용 : 남해각 모텔은 잘 됐나요?

박용길 : 그 때는 학생들 수학여행 오면 전부 여기로 왔고. 신혼여행도 오고. 신혼여행도 요즘이니깐 해외로 나가지. 그 때는 해외 나가기도 어렵고. 제주도 아니면 경주나 남해. 이쪽으로 합천 해인사나 이쪽으로. 모텔에 단체팀들 자고 가고. 그 당시에는 마을에 여관이 있었고 승일여관이라고. 저쪽에 여인숙이 하나 있었고. 그 정도지. 그 당시에는 저녁때에도 북적북적 그랬지. 자는 사람들이. 내려왔다가 가고. 기념품도 많이 사고. 그 당시에는 책받침, 펜던트, 뱃지 그런거. 단체들 오면 남해대교 그림 넣어서 기념 타올. 

최승용 : 남해각 옆 식당&카페 로렐라이는 언제 지었나요?

박용길 : 로렐라이는 휴게소 개념으로 지었지. 그 당시에는 사천휴게소가 없었기 때문에. 남해각이랑 서로가 경쟁이 됐지. 로렐라이 생기면서부터 남해각이 더 침체가 됐지. 담도 쳐버리고. 남해각 오는 차들은 위에다가 주차를 했는데 화장실 있는 곳. 

최승용 : 노량마을이 원래 물이 부족했나요?

박용길 : 설천면 일대가 전부 지하수. 마을 별로. 상수도가 안들어와서 제일 남해에서도 설천면이 낙후되어 있지. 여 상수도 들어올려면 앞으로 2-3년 있어야지. 노량대교 상판쪽으로 상수도 라인 해주겠다고 했는데 다리가 움직이니깐 어렵다고 했지. 그래서 바다 속으로 한다고도 했는데 예산이 어마어마 하니깐.

최승용 : 사진사 일은 왜 이렇게 마지막까지 하셨어요?

박용길 : 내가 이 마을에 살고 있다 보니깐 늦게까지 한 거지. 내가 말을 가지고 있었고. 카메라가 많이 보급되었는데 말 한 번 타고 사진찍고 했지. 말 한 번 타서 사진 찍는데 500원을 받았으니깐. 말 보러 일부러 오는 사람도 있고. 말은 내가 한 10년 관리를 했지. 

최승용 : 어르신은 남해대교를 보면 어떤 마음이 드세요?

박용길 : 남해대교 때문에 내가 이 마을에 살게 됐지. 남해대교 때문에 먹고 살게 됐지. 대교에 카메라 메고 사진사 하게 된 이유는 집안 형 되는 분이 김해에서 사진관을 하고 있었어. 하고 있었고. 할게 없으면 내한테 온나 해가지고. 그래가지고 내가 김해로 갔지. 한 1년 가까이 있었지. 그렇게 있다가 거기서 사진기술을 배워가꼬. 다른 사진관에 한 달에 얼마씩 월급받고 일했고.

최승용 : 그 때가 한 몇 년도 쯤 인가요?

박용길 : 내가 대교에 카메라 메고 나온 것은 75년부터 나왔고. 

최승용 : 대교 사진사도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었나요?

박용길 : 단체 손님들이 와 가꼬 남해각에 뭐 이런데 오후 늦게 저녁에나 이럴 때 단체손님 오는거 잘 보거든. 봐가지고 저녁에 가서 단체 몇 명 왔는지 모텔에 확인해가지고 와가꼬.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침에 바깥에 구경하러 나오는 사람들이 있거든. 나오면 아침에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 붙들고 사진촬영하라고 말하고. 아침밥도 안 먹고 나와서 사진 찍고

최승용 : 그 사람들이 구경하러 나오면 어디어디를 가보나요?

박용길 : 남해대교 보고 충렬사 가보고, 대교 한 번 걸어보고, 기념품도 사고. 그 당시 여기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 대교를 한 번 걸어 봤어요. 그 당시에만 해도 남해대교가 동양 최초로 현수교가 만들어졌다 해가지고 “연세 많은 분들은 세 번을 걸어야 저승가는 길이 편하다.” 라는 전설이 있어서. 

최승용 : 노랑다리 민요도 있던데요? “최치환이 울음다리 신동관이 출세다리.” 

박용길 : 하춘화가 부른 노래도 있어. 유자 따는 남해 처녀 인가. 최치환씨 비석이 요 옆에 있잖아요. 

최승용 : 들어보니깐 설천면 사람들이 남해대교 지을 대 잡부로 일하고 그랬다던데요.

박용길 : 어 그랬지.

최승용 : 어르신은 남해각이 옛날처럼 활성화되면 좋으시겠죠?

박용길 : 아무래도 노량대교 생기면서 이쪽에 볼일이 있고 식사할 사람들만 내려오지 사람들은 바로 저쪽으로 바로 통과하지. 

최승용 : 노량마을이 예전에 회센터로 유명했잖아요?

박용길 : 아무래도 손님들이 많이 올 때 계속 올 수 있도록 노력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지. 사실상 지금 보면 많이 달라져서 지금은 잘해주는데도 인식이 그 때 안 좋아져서. 지금은 또 다른 곳에 새로 많이 생겼고. 

최승용 : 남해각에 어떤 시설이 있었으면 좋으시겠어요?

박용길 : 전시장만 있으면 그것만 둘러보고 갈꺼 아닌가베. 이순신 장군 유품 같은 것을 놓으면 어떨까. 옛날에 한동안은 대아중고등학교 교장이 인수해서 영업을 했거든. 하면서 식당 한쪽에다가 유리로 뺑 둘러서 이순신 장군 유품을 전시도 해놓고 그랬었어. 여기 노량해전이다. 

최승용 : 노량 사람들한테는 뭐가 제일 필요할까요?

박용길 : 일단은 여기에 새로운 것이 좀 생겨가지고 외부에서 관광객이 많이 들어올 수 있게끔 해야지. 여기도 가족단위로 와가지고 쉴 수 있는 곳을 만들어 놔야 되는데. 놀이기구도 그렇고. 여름철 되면은 해수욕장도 많이 가지만 조용히 해수풀장이라도 갖춰져서 발 담글 수 있게. 봄 되면 꽃 단지도 만들어 놓고. 옛날에 남해군에서도 식물원을 만들꺼라고 계획을 가지고 있었어. 근데 토지 매입도 안되고 또 예산상에 문제도 있었겠지만 성립이 안되더라고. 그래도 산성산에 국립공원에 묶여가지고 옛날에 거기다가 이순신 장군 동상 세우고 전망대 놓을거라고 1차예산 확보하고 보상까지 해 준 곳이 있어요.  그 때는 하루에 대교를 걸어서 네 번을 왔다 갔다 했었어. 지금은 문화재해설사가 있어서 지역에 대해서 안내도 해주고 그러잖아요. 그 때는 해설사가 없었거든. 손님들이 이 대교가 언제 생겼어요 물어보면 우리가 다 말해주고. 68년5월에 착공해서 73년 6월 22날 개통했습니다. 기둥높이 60미터 총 길이 660미터 총 공사비 18억2천5백만원. 그 당시에 개통할 무렵에 인건비 해봐야 하루 오백원. 잡부들 인건비가. 남해대교 글씨는 박대통령이 직접 쓴 글씨를 했고.

최승용 : 남해대교의 산 증인이세요.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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