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강외자 님

이름. 강외자

일시. 2019년 9월 25일

장소. 설천면 노량리 윌마 카페

참석자. 강외자, 최승용(헤테로토피아 책임연구원), 서성경(헤테로토피아 연구보조원)

 

강외자 : 내가 지금 65이거든요. 내 기억에 내가 21살에 그 정도 기억인데 브라보콘을 해태가 만들었기 때문에 브라보콘이 남해에 처음으로 들어온 걸로 기억해요. 아이스크림을. 그러기 전에는 하드. 아이스깨끼 이런 것만 가게에서 팔았어요. 얼음 넣어가지고 아이스깨끼. 하드를 넣어가지고 이렇게 뚜껑열고 사먹는데. 그렇게 메이커에서 아이스크림으로 우유를 넣어가지고 만든 거는 처음이었었어요. 남해에도 저기가 처음이었어요. 저희들 기억은 그렇거든요. 그래가지고 브라보콘이 너무너무 신기한 거에요. 그래가지고 처녀 때..

최승용 : 가격은 기억하세요?

강외자 : 일단 우리가 사먹기에는 벅찬 가격. 정확히는 기억 안나요. 일단 한 참 어린 아가씨가 되가지고 동네에 한 두 살 많은 언니들과 동네에 있는데 이웃동네 그 먼 동네에 총각들을 꼬셔가지고 아이스크림을 사먹어야 되는데 그럴 때는 처녀 총각들의 만남의 장소가 저기 아니면 갈 때가 없었어요. 저기가 로망이에요 로망. 저기 앉아가지고. 전망 좋지. 바다를 바라보고 대교 보이는 곳에. 남해각만 턱 버티고 남해의 상징물 이었거든. 아무 소재는 찾으면 많을 거에요. 그래가지고 그 총각들을 꼬셔가지고 아이스크림을 얻어먹기 위해서 총각들을 꼬셔가 왔는데 그쪽도 대여섯명 우리도 대여섯명 이었을 거에요. 남해각에 가서 아이스크림 사주라 했더니. 그냥은 못 사준다. 한 사람당 20개씩은 먹어야 즈그가 돈을 내고 20개씩을 못 먹으면 우리가 돈을 내고. 인제 이래 된 거예요. 그런데 그럴 때는 한 두 개 먹는 것도 대단해야 먹지. 비싸니깐. 쉽게 못 먹을 때인데 20개를 먹으라 하니깐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같이 있는 친구 중에 한 살 많은 이모도 있었어. 우리 이모는 20개를 거뜬히 먹었는데 나는 11개에서 스톱이 되버렸어. 그러면 내가 9개를 못 먹으면 돈을 내놔야 하는데 그 돈은 엄청난 큰기 였거든. 아이스크림 값을 다 내려면. 이모는 무조건 입에 넣는 척하면서 나한테 주라. 그래서 우리 이모는 29개를 먹은 셈이고. 그렇게 먹고 왔는데 11개 먹은 나는 병을 하고 그 차가운 걸 많이 먹었으니깐. 내 기억에 날씨가 좀 쌀쌀 했을 때라. 그래가지고 병원에 드러눕고 했는데 많이 먹은 우리 이모는 끄떡도 안하고. 지금도 내가 아이스크림을 볼 때. 지금도 해태에 브라보콘이 나오잖아 항상 그 때가 떠오른다니깐. 나만의 추억들이야 저곳들이. 그 때 내가 심하게 아팠고 하니깐 기억에 딱 남아있어. 일단 남해에서 맞선을 본다하면 저기가 최고의 자리에요. 사실 남해에 저런 자리가 없었었거든.

최승용 : 그러면 그 전에는 남해의 현재 읍, 남해읍이 발전이 안 되어있었나요?

강외자 : 아이고 없지. 건물 자체도 그런게 없고. 없었어요. 남해는 아주 낙후되가 있었지. 저기 생김으로 해서 모든 사람들이 이 주위에 하동 남해 진주 이쪽에서 맞선을 본다하면 다 이리로 왔고 상견례 자리가 여기였고. 정말 대단한 곳이었어요. 남해각에 거기에서 레스토랑 같이 음식도 나오고 지하에는 나이트클럽이 있고. 남해 최고의 나이트클럽이었거든. 밴드들이 와가있고 총각들 꼬시면 거기가서 구경하는 것이 최고의 그거였고

최승용 : 지하가 나이트클럽 일층이 레스토랑, 이층이 숙소이고

강외자 : 이층에 숙소. 

최승용 : 신혼여행지로?

강외자 : 신혼여행지로는 최고의 자리였지.

최승용 : 신혼여행 오면 코스가?

강외자 : 지금은 남해 들어가서 볼 때가 많아졌지만 저기와서 자고 바다를 보고 대교를 보고 가는 것도 코스였어요. 그러면서 시간을 보내고. 남해 안에 사람들도 전부 다 이리러 나왔고. 남해에서는 유일하게 최고의 건물이었고. 전에는 어린이날 되면 노량이 포화상태 였어요. 남해군의 어린이들은 다 데리고 나왔거든. 지금은 창선대교 생겼고 스포츠파크 생겼고 독일마을 생겼고. 다랭이 마을. 그 때는 다랭이라는 말이 없었지. 그때는 남해가 관광 불모지

최승용 : 남해대교가 전국명소 였다고 하던데요?

강외자 : 일단 살아생전에 남해대교를 3번을 건너지 않으면 저승을 제대로 못간다는 소문이 나가지고 대교가 사람이 너무 많이 걸으면 출렁출렁 했어요. 낮에는 동네 사람도 음식점에 가서 먹을 수가 없어. 외부 사람들이 많이 와서. 그러니깐 이렇게 보면 바다니깐. 대교에 사람들이 너무 왔다갔다 많이 하니깐 대교가 흔들흔들 했거든요. 그럴때는 어릴 때 기억에 대교는 흔들려야 된다고 했거든. 저희 외갓집이 식당을 했는데, 지금 현재 남청횟집 저 자리가 우리 외갓집 이었는데 아침에 내가 외갓집에 가면 돈만 받아주는 역할을 해도 이 앞치마가 까득 차가지고 묶어놓고 또 바꿔서 묶어놓고. 우리 외할머니는 가마솥에 밥을 아침부터 쌀을 씻어 앉히면 저녁까지 계속 퍼내고 앉히고 그랬어요. 그 정도로 손님이 많았어요.

최승용 : 제일 화려했던 시절이네요. 그때가. 

강외자 : 진짜 화려했던 시절이었지. 

최승용 : 그 전성기가 언제쯤 떨어졌어요?

강외자 : 그 전성기가 참 오래 갔었어요. 오래도록 참 괜찮았는데 창선대교가 생기면서. 나눠져 버렸잖아요. 그러면서 독일마을 생겼지. 스포츠파크 생겼지 하면서 옛날 같은 참 그때는 엄청났어요. 

최승용 : 지금은 많이 상권이 죽었죠?

강외자 : 엄청나지. 2/3는 없어졌어요.

최승용 : 물론 지금 남해각을 유명 건축가를 데리고 와서 재생을 하는데 솔직한 말로 저걸 한다고 해서 관광객이 많아진다는 보장은 없어요. 그래도 남해사람들한테 남해대교와 남해각은 화려한 시절. 상징적인 의미가 크죠. 만약에 남해대교와 남해각이 없어진다면 마음의 상실이 클거에요. 그런 기억을 이런 사연들을 모아서 전시하는 공간 만큼은 있어야 된다. 그래서 이번에 남해에서 내세우는 것은 남해의 시작점을 되찾는다 이거거든요. 지금은 시작점이 어딘지 몰라요. 그래도 남해하면 남해대교가 남해사람들한테는 어머니 다리라구요. 랜드마크에요. 남해대교 그 전과 후가 완벽히 달라졌으니깐요. 남해각을 저렇게 다 철거해서 하는 것 보다는 저 안에 기억의 예술관을 넣는게 그리고 옛날처럼 공원형 전망대. 지금 남해에서 하고 있는 전망대들이 공원형이 아니고 엘리베이터타고 쭉 올라가서 한 바퀴 돌고 가는건데. 저기는 공원형 전망대에요. 그래서 이런 사연들을 모아서 애니메이션도 만들고 책도 만들고 영화도 만들고 그렇게 할려고 사연들을 모으고 있어요. 사진들은 꽤 있으시더라구요.

강외자 : 지금 우리동네 계시는 박용길씨. 거기서 사진사를 했기 때문에 많은 에피소드가 있을거에요. 남해는 남해각이 우리 여기 남해로 치면 유서깊은 곳이에요. 물론 이순신 장군의 그것도 되지만 우리집 앞에 도선이 다녔거든요. 도선이. 도선이면 옛날에 막 우리 어릴 때 남해에서 군에 가는 아들 군에 보낼 때 여기까지 배웅을 해요. 지금 내 기억에 한 할머니가 이제 도선을 타고 저쪽 건너로 가야 육지로 가는 버스를 타고 연결이 되니깐. 여기서 딱 도선이 떠나면 엄마는 여기까지 배웅을 하며 여기 앉아가. 호박국 잘 먹는 내 아들아. 호박국 잘 먹는 내 아들아. 하는 할머니 기억이 나요. 내가 초등학교 1, 2학년 쯤 되는데, 얼마나 선명했으면. 할머니가 울고 있었어. 왜 우냐고 내가 물어보니깐. 할아버지 왜 할머니 울어? 아들이 군대간다. 남해로서는 여기를 거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되었지. (개통식)참 그때만 해도 박 대통령이 걸어오시고. 요새는 풍선도 기계로 뿡 하면 불지만. 여기 동사무소에서 밤새도록 불고 그랬어요. 우리 어릴 때. 박 대통령. 

최승용 : 그 때 들어보니깐 국회의원 두 명? 최치환이 눈물다리 신동관이 출세다리

강외자 : 최치환씨가 다리를 놓기 위해 지금도 그때 지금 비치텔 옆에 비가 있어요. 그 분이 국회의원 시절에 울면서 책상을 두드리면서. 그 때 당시에 통계로는 여기에 다리를 놓을 수가 없었대요. 인구나 교통량을 따져 봤을 때는. 그런데 우리 남해를 섬에서 탈출 시켜야 된다고 해가지고. 최치환씨가 국회에서 책상을 치면서 건설 뭐 교통과에서 소속이었다든가. 울면서 막 그 예산을 따내기 위해서 했대요. 그래서 최치환이 눈물다리 완성 다 못시키고 거의 다 될 무렵에 신동관씨가 국회의원이 됐거든요. 그래서 신동관의 출세다리. 그래가 지금 요 우리집 옆에 이리는 공터였거든요. 거기서 최치환씨가 연설하시면 대단했었어요. 다리 기공식 할 때는. 최치환씨가 몇 번 오시고 우리 어릴 때는 앉아서 보고 있고. 최치환씨는 지금 같은 국회의원이 아니였어요. 옛날에 그런 분들은 진짜 지역을 위해서 대단했다고. 

최승용 : 남해대교 개통 할 때는 기억나세요?

강외자 : 개통 할 때보다는 교각 세울 때 진짜 엄청 났어요. 큰 바지선으로 딱 저렇게 만들어 놓은 걸 가지고 온걸 세웠거든. 하나 세우고 저쪽에 빨간 것도 하나 세우고. 케이블카로 왔다갔다 선이 연결되고. 경남 쪽 사람 다 구경와서 그 큰 바지선 올 때 엄청나게 큰 바지선이 왔거든. 구경 온 사람이 너무 많았었어요. 그래도 남해대교 만들 때 사람 하나 안 죽었잖아요. 그래서 항상 이 바다에는 우리 동네 애들도 이 바다에서 익사한 사람은 없어요. 우리도 어릴 때부터 이순신 장군이 돌본다. 이래가지고 그런 익사자가 없었다. 외부 사람들이 와서 죽은 경우는 있어도 우리 마을사람이 물에 빠져 죽은 적은 없어요. 

최승용 : 이쪽을 노량 앞바다, 노량해협 라고. 물살이 쎈편 아닌가요?

강외자 : 물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옛날에 삼신할머니 뭔 할머니 마냥. 바다에도 그런 할머니가 있었대요. 그 할머니가 저기로 건너가는데 대한민국 어느 바다로 가도 고쟁이가 안 졌는데 여기는 졌는다고. 그만큼 깊다. 이랬었어요. 그래서 이 바다는 수심도 깊고 조류도 빠르고. 그래서 고기도 맛있고 물살이 쎄야 고기가 맛있으니깐. 

최승용 : 그러면 남해대교 개통 할 때 어디에 계셨어요? 개통식 할 때 어디계셨어요?

강외자 : 개통식 할 때 우리들은 군에서 이렇게 단체들이 나와서 하는데 동사무소에서 많이 도와주는 일을 많이 했어요. 대통령 앞서고 뒤에는 엄청난 사람들이 계속 그 때부터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어요. 대통령 왔다 가고 나서. 남해대교를 살아생전에 3번 건너지 않으면 저승을 못간다 해서 많이 왔다니깐. 걸어서 건넜다가 갔다오고. 걸어갔다 와야 사람들이 걸으면서 여기서 먹고. 상권이 여기 형성이 되가지고. 남해각이 개통하고 나서 뒤에 오픈했거든요. 개통하고 대통령 왔다가고 나서부터 사람이 몰리기 시작하는데 길 가에 집이 있는 집은 가정집이더라도 무조건 장사를 했다 아닙니까. 

최승용 : 남해대교 개통식 할 때는 동사무소에서 일을 도왔네요?

강외자 : 그럴때는 대통령 온다 이러니깐 온 사람들이 마을에 상주를 하더라고. 그래마 우리들도 군에서 각 단체에서 오는 사람들이 많았었지. 대통령 온다하니깐. 내~ 동사무소에서 음식 이런거 뭐 그 사람들 밥도 해주고 이러면서 하다못해 풍선불기까지. 

최승용 : 개통식을 준비하는 일을 하셨군요. 남해각이 오픈을 했을 때 만남의 장소가 된 것이 여기가 저런 신식 시설이 남해에 없으니깐.

강외자 : 그때 당시 해봐야. 무슨 다방 이런 거였지. 남해각에서 만나자. 모든 만남의 장소는 남해각. 그럴 때는 남해각에 해태에서 직영하고 이럴 때는 직원으로 있는 것도 대단했어요. 우리 동네 아가씨도 하나 시집을 갔고. 요즘 공무원들 아무것도 아닌 거였죠. 아이스크림 하나를 팔아도 대단한 자리였다니깐. 

최승용 : 식당에서 차도 팔고 그랬어요? 음료? 

강외자 : 그 때만해도 양식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 남해각 이였어요. 도시생활을 접할 수 있는 곳. 돈까스, 아이스크림, 밥도 팔지만은 한식 종류가 아닌 뭐 이렇게 양식으로. 내도 돈까스라는 음식을 저기서 처음 먹어봤어요. 일반 가게에서 살 수 없는 것은 거기가면 있었어요.

최승용 : 그러면 아이스크림이라고 하면은 슈퍼도 있었나요?

강외자 : 남해각 안에 판매대가 딱 있다니깐. 거기가면 고급 음식과 간식들을 살 수 있었지. 

최승용 : 근데 여기는 노량 사람이니깐 가는데 다른 남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왔나요?

강외자 : 버스타고. 대교에서 항상 정차를 하잖아. 대교에는 항상 정차를 하니깐. 오는 것도 서지만 가는 것도 서고. 그러면 내려가지고. 

최승용 : 그런 만남의 광장도 있었고 부산에서 오는 배도 배웅하며 만나는 만남의 광장이 있었고. 

강외자 : 배가 부산에서 여수까지. 하루에 3번씩 여기 정차를 했거든. 대교가 생기고 나서 나중에는 쾌속선 엔젤호가 있었지. 일반 여객선은 없어져 버렸지. 그러면서 남해에서 부산으로 가는 고속버스가 생겼잖아. 대교가 있으니깐. 그래가지고 배가 제 아무리 빨리와도 차보다는 늦잖아. 그래서 부산가는 시간이 단축이 되었잖아. 여기서 부산까지 배로 7시간 10분 걸렸으니깐. 

최승용 : 그러면 언제 처음으로 남해를 나가보셨어요?

강외자 : 내가? 배타고 부산은 많이 갔지. 충무 가면 충무김밥 하는게 배에 가면 할머니들이 함지박에. 그 김밥을 먹기 위해 엄마들 쫄라가지고 가기도 했다니깐. 그것은 대교가 생기기 전이고. 아침에 아홉시 반 배. 오후에 두시 반. 저녁 아홉시 반. 이렇게 하루 세 번이였어. 그거 타고 가면 마지막 배 올라올 수도 있고. 가서 자고 뒷날 오지. 그러니깐 명절 때 이렇게 될 때는 그 여객선 타고 와가지고 남해 버스가 한계가 있으니깐 요즘같이 차가 있는 것도 아니 였고. 이 동네에는 어떤게 있었냐하면. 대교 생기기 전에. 명절 때 되면 동네에 할머니 할아버지들 항상 배 닿는 부둣가에 가 서가 있어요. 그러면 집에 명절 때 뭐 가지고 오잖아. 과일 같은거 술병 정종 이런거. 그런데 그걸 들고 차를 탈 수가 없으니깐 버리고 가는거야. 그러면 그걸 줍는다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줍는다고. 명절에 몸이라도 집에 가야하니깐 들내버리고 가고 했어요. 내가 공부를 좀 했어요. 한 달 한 달 되면 각 학교마다 한 사람씩 제일 공부 잘하는 사람을 뽑아서 남해초등학교에서 시험을 쳐요. 그러면 거기 뽑혀야 선생님이 택시를 타고 데리고 읍으로 가는거라. 버스를 안타고. 버스 시간이 안 맞으니깐. 택시를 타고 선생님하고 가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했고. 그러면 끝나고 나면 읍에가서 짜장면을 사줬어요. 그 짜장면하고 택시를 타기 위해서 공부를 했다니깐. 일반인들이 자가용은 상상도 안 해봤지.

최승용 : 버스도 많이 안 다녔겠네요.

강외자 : 배 시간 맞춰서. 아침에 일어나면 다섯시 반에 있는 것은 지금까지도 그 차가 있어. 내 기억이 만들어질 때부터 다섯시 반쯤 일어나 읍에가면 차가 있는데 그게 지금까지도 있는거 같더라고. 

최승용 : 버스터미널이 지금 위치였나요?

강외자 : 아니 지금 사거리에. 

최승용 : 어머님은 왜 밖으러 안 나가셨어요?

강외자 : 내가 한 참 클 나이에 몸이 많이 아팠었어요. 나갈 수 가 없었요. 근데 결혼을 해서도 우리 아저씨가 케이티에 근무를 했는데 남해읍으로 갔어야 했는데 나는 못갔어요. 노량을 떠날 수가 없어서.

최승용 : 친구분들은 많이 나가셨죠?

강외자 : 다 나갔지. 이제는 조금씩 조금씩 귀향을 해서 오지. 

최승용 : 부산으로 많이들 가셨죠?

강외자 : 여기서 여객선이 있었기 때문에 부산 삼천포 통영 이런식으로 그런 배가 닿는 곳에 많이 갔었어요.

최승용 : 도선이 못 건너는 날도 있었나요?

강외자 : 도선이 처음에는 목선. 나중에는 철선. 나중에 철선이 만들어 지면서 처음에 대교 생기기 쫌 앞에부터 부산가는 버스가 생겼거든요. 그 버스를 그 도선이 싣고 날랐죠. 공사할 때 생겨가지고 이렇게 다녔어요. 배가 실어 나르고 그 배가 꽤 컸어요. 배가 앞을 내리면 차가 들어가 싣고. 도선은 저 건너하고 여기만 왔다갔다 하는 배이고. 바지선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여객선이 바다에 떠가지고 있으면 조그만한 배가 가가지고 사람을 싣고 내리고 하다가. 저기다가 군에서 바지선을 만들어가지고 이제 바지선에 배가 댔어요. 

최승용 : 날씨가 안좋거나 풍랑이 있으면 못건너고 그랬겠네요?

강외자 : 근데 여기가 안 바다가 되가지고. 제일 위험한 곳은 낙동강. 거기서 사고도 많이 나고. 또 여기도 지금은 광양제철이 생겨가지고 있지만 거기가 다 허허벌판 이래가지고 여수 가면서도 사고가 나가지고 한꺼번에 많이 죽은 일도 있고. 이 길 바깥은 전부 바다였거든. 매립했거든. 

최승용 : 매립은 노량주민들이 원했어요?

강외자 : 김두관 군수 시절인데 충렬사 성역화를 시키면서 이게 오랫동안 성역화 한다라는 계획안이 나와 있어도 실질적으로 시행을 못하고. 집을 지을라하면 못짓게 했고. 이래가지고 주민들이 그게 참 많았어요. 이 사람들이 이주할 곳이 여기야. 사실 우리 동네 사람들이 지금 같은 머리가 아니잖아. 요즘은 매스콤이 발달 되가지고 모든 것을 알 잖아요. 그때만 해도 쫌 많이 우리 동네 사람들이 이게 잘 못됐다고. 어쨌든 저쪽으로 빠져나가든 해서 바다는 살려놨어야 했는데. 이런 구상을 다 예사롭게 생각했던거지. 오랫동안 묶어놓고 있었으니깐 막 사람들이 내 재산권을 행사도 못했잖아. 못 짓고 이러니깐. 그 사람들 다 나와가지고. 

최승용 : 제 기억에 서울에서 남해 올 때 버스를 타고 오면 진교를 지나 노량해협이 보이고 남해대교가 딱 보이면, 버스 안에 있던 분들이 엉덩이가 들썩들썩 하고 다 전화기를 들어서 나 대교다 이러더라구요. 이 사람들한테 남해대교는 어머니 다리다.

강외자 : 예! 우리도 딱 저 모서리 딱 들어오면 대교가 탁 보이면 “아 인자 왔구나!” 인제 고향에 다 온 거 같지.

최승용 : 근데 지금 노량대교가 생기고, 남해각이 망해버리고. 이렇게 놔두면 안 될 것 같아요.

강외자 : 그나마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을 한게. 없애버리지 않고. 

최승용 : 없어지면 안돼요. 저희도 남해각 건물을 예사로 봤다가. 건축가가 와서 보더니 이거는 그냥 민간이 지은 건물이 아니라는 거에요. 왜냐면 이거는 설계하는 사람이 즉 전문 설계를 하는 사람이 설계를 했고 어려운 공법으로 건물을 지었다는 거에요. 위로 갈수록 넓어지게 지었다는 거에요. 그런데 70년대 그렇게는 시공을 못한대요. 겁이나서. 무너질까봐. 그래서 나중에 제보를 받았는데 해태가 지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건물 조사를 했죠. 근데 남해각은 기둥이 달라요. 이게 뭐냐면은 남해대교 주탑을 상징화 해서 만든거에요. 저 주탑이 남해대교를 안고 있잖아요. 저거는 건물을 안고 있는거에요. 그러니깐 굉장히 귀중한 건축물이에요. 남해 사람들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좋기도 하지만은 건축학적으로도 대단히 귀중한 건축물이에요. 근데 저거를 부수면은 안되죠. 저런 것은 살려야 해요.

강외자 : 그게 어떤 전문가가 오지 않았으면 그런 걸 예사로 생각하고 부숴버릴 수도 있었겠죠.

최승용 : 아무래도 오래 됐으니깐 부숴서 새로 짓는게 더 편했겠죠. 근데 그렇게 하면은 남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저기에 대한 기억은 반으로 줄어 들었을 거예요. 그게 실제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에요. 지금 아예 건축가가 생각을 바꿔서 저것은 원형의 복원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해요. 

강외자 : 그래도 참 다행이다. 

최승용 : 저게 있어야지 브라보콘이 생각나고. 저기에 아무 일 없이도 저기에 가고 놀러가고 그랬나요?

강외자 : 뭐 모이면 우리 오늘 저녁에 아이스크림 사 먹으러 가자. 항상 거기 가야하니깐. 그렇지 않으면 없잖아. 남해읍에 사람들도 노량가서 남해각 가자. 이러면서 나왔을걸요. 종업원도 많고 항상 사람들이 붐비고. 

최승용 : 기념품도 팔았나요?

강외자 : 뱃지, 대교 타월, 여러 가지로 나오거든. 이 동네 사람들도 기념품을 이렇게 대주는 사람이 있었어. 진주에서 기념품을 대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가지고 손목에 딱 걸고 나가면 들고만 나가면 팔아요. 뱃지하고. 들고만 나가면 판다니깐. 남해각 밑에 그 광장에서 거기 전부 동네 사람들이 판을 놓고 장사를 했어요. 심지어 다른 부락 사람들도 와서. 여기 탁 수건 얹고 뱃지 들면 팔아요. 

최승용 : 거의 프랑스의 에펠탑 이네요.

강외자 : 맞아요. 학생들 수학여행 코스가 남해대교 였어요. 충렬사. 학생들 단체로 막 오면은 선생님들 인솔해가지고 이래가 수건걸고 뱃지 이리 들면 학생들도 뱃지사고 수건 사고. 수건은 엄마주고 뱃지는 즈그가 하고. 이랬을 것 같애. 그러면 동네 사람들도 하루 일당 충분히 벌었어요. 이렇게 해가지고. 기념품은 남해각에는 해태에서 직영을 해서 큰데서 들어왔을거고. 여기 마을사람들은 중간에 차가 와가지고 갖다 주는 사람이 있었어. 그럴 때는 비수기 이런 것도 없었어요. 

최승용 : 그러면 그런 전성기가 90년대까지?

강외자 : 아이고 오래 갔습니다. 창선대교 생기고 그래도 관광철에는 엄청 왔거든요. 창선대교가 생기면서 탁 분산이 되버리니깐 틀리데요. 50-60프로는 차이가 나더라구요. 지금은 창선대교로 와가지고 다랭이 마을 독일마을 보고나서 거기로 바로 나가버리잖아요. 일단 창선대교가 생기기 전에는 어쨌든 관광철에 특히 여름 해수욕 철에 남해대교가 막히는 것이 허다했거든요. 대교에서 통제 했잖아. 오늘 또 통제 하는 갑다. 그랬거든 우리가. 그런데 창선대교 생기가 나면서부터 한 번도 그런걸 못 봤어요. 차량이 너무 많이 오니깐 일단 스톱을 시켰는데 못 빠져나가니깐 남해안에서. 군에서도 남해각 개발을 하면서 이 동네로 관광객이 유입이 될 수 있도록.

최승용 : 그것이 하드웨어적 방법보다는 노량마을 자체의 매력이 중요해요. 

강외자 : 우리도 교육을 받고. 그러면서 하나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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