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Nostalgia


<남해대교 건설현장>

김삼두님(1954년생, 남해읍)은 남해읍에서 부산 배터리라고 아버지와 함께 자동차 정비일을 하고 있었다. 남해대교 건설현장에서 호출이 와서 가보니 중장비가 고장나 있었다. 그 차를 고치고 나니 고맙다고 현대건설 담당자가 기념사진으로 만들었다고 위 사진을 주었다고 한다. 남해대교는 현대건설이 주축이 되어 일본 기술자들을 불러와 도움을 받았는데, 김삼두님의 기억에 “남해읍에 봉전이라는 곳이 있는데 깨끔네 집이라고 아지매가 엄청 쓸고 딱고 하니깐 재떨이 들고 쫓아 다니니깐 그래서 깨끔네 집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일본인 기술자들이 먹고자고 했다.”


<김삼두 님(왼쪽) 군대 가기 직전 친구와>


<남해각(해태각)>

남해각 지하에는 나이트클럽이 있었고, 1층에는 식당과 상품 판매장, 2층에는 숙소가 있었다. 나이트 클럽에는 밴드마스터가 있었고, 밤 12시까지 영업을 했다. 남해 사람들이 남해각(해태각) 나이트클럽에서 술 한 잔 먹은 다음 날에는 “나 어제 해태각에서 술 한 잔 묵고 택시타고 왔다.” 고 자랑삼아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 당시 남해에서 도시 문물을 구경하고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남해대교는 지역민 뿐만 아니라 전국의 관광명소였는데 김삼두님에 의하면 현재 남해에서 제일 유명한 곳이 독일마을인데 그곳은 남해의 명소이지만 남해대교는 전국명소였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국민들이

“네 남해대교 가봤나?”

라고 말할 정도였다.


<아버지 김소원(1927년생), 어머니 정말선(1929년생)>

<이모님과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김소원, 1927년생 왼쪽에서 세번째)와 아버님 동네 친구들>

<1976년 11월, 이종사촌 누나네 식구들과 부모님, 남해쪽에서>

<1976년 11월, 이종사촌 누나네 식구들과 부모님, 하동쪽에서>

김삼두님은 남해에서 정비일을 하다가 좀 더 벌이가 좋은 부산으로 취직해 나갔다. 갑성호라는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갔는데 8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부산에서 터 잡고 살았는데 고향에 계신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암 판정을 받았다. 의사가 어머님 암이 전이 될지 안 될지 5년은 지켜봐야 안다고 했고, 본인도 부산에서의 삶이 녹록지 않아서 읍에 좀 무리해서 3층 건물을 지어 이주 했다. “그 때 평당 55만원 들었는데 그때 선택이 옳았어. 잘 돌아왔어.” 인터뷰를 마치며 김삼두님께 남해대교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물었다. “서울이나 부산 갔다가 돌아오는 버스에서 남해대교가 보이면 ‘대교다!’ 마음이 편해진다.” 그 편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여기서부터는 걸어서라도 집에 갈 수 있잖아.”

남해가 섬이던 시절을 살았던 분들은 바다를 건너야 내 집에 도착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있을 테고 그 ‘바다를 건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부담감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남해대교가 보이면 ‘저기만 건너면 우리집에 갈 수 있구나.’하는 안도의 마음이 드는 것이다. 섬에서 태어나 먹고 살려면 밖으로 나가야만 했고, 쉽게 돌아 갈 수 도 없는 먼 섬이라 고향에 대한 그리움 “nostalgia”은 더욱 강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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