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강광수 님

이름. 강광수

일시. 2019년 10월 21일

장소. 설천면 노량리 충렬사

참석자. 강광수, 최승용(헤테로토피아 책임연구원), 서성경(헤테로토피아 연구보조원)

 

최승용 : 사시는 곳이 노량인가요? 여기서 태어나서 계속 여기서 사셨어요?

강광수 : 중간에 객지생활도 2-3년 했지. 

최승용 : 왜 다시 남해로 돌아오셨어요?

강광수 : 그 때는 어머니가 혼자 계셨고, 형제들이 여럿이라도 그때만 해도 형제가 여럿이니깐 한 사람은 고향을 지켜야지 않으냐 하는 의식이 강할 때가 되어서. 어머니 모실 사람도 없고. 그래서 내가 내려왔지. 

최승용 : 돌아와서는 농사 지으셨어요?

강광수 : 그 때 뭐 어머니가 농사 좀 짓고 나는 직장생활 하고 그랬어. 90년도에 충렬사 관리하러 들어와서 한 이십 몇 년 있네. 

최승용 : 그러면은 남해대교 또는 남해각 그리고 노량마을 돌아가는 것을 쭉 보셨겠네요. 충렬사가 변화되는 모습도 보고.

강광수 : 남해각 지을 때는 우리가 알바도 했는데. 우리 친구들 잡부 일을 했지. 그때는 콘크리트 타설 기계들이 없었으니깐 등짐지고 다 옮겼으니깐. 

최승용 : 남해대교 지을 때도 여기 마을 분들이 일을 많이 했다고 하던데요.

강광수 : 이 인근 분들이 그 당시 일하신 분들이 바닷가니깐 배 같은 것 가지고 그 때는 배가 필요했으니깐. 그 당시 대교 공사. 요즘에 도비. 저 높은데 가서 일하시는 분들. 그 일하다가 한 분이 이쪽에서 결혼해서 사시는 분도 계시고. 고향이 다른데 대교 일하러 들어와서 여기에 정착을 했지. 노량 여자분을 만나서. 경북 회 센터. 지금은 자녀 분들이 하고 있지. 울 친구들도 한 사람 같이 와서 그 친구도 자기 어른이 여기 대교 도비 일. 그 당시에는 그 업이 귀한 업이 되가지고 인건비가 굉장히 쎗거든. 그 때는 인력으로 다 했으니깐. 그 어른도 그 친구도 여기 와가지고 초등학교 오학년 육학년 때 와가지고 여기서 내 살았지. 어른들도. 여기서 내 살다가. 여기 떠난지가 십몇 년 됐네. 그 어른 돌아가시니깐 떠나게 되더라고. 원래 고향이 아니니깐. 

최승용 : 노량마을은 남해대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잖아요.

강광수 : 노량마을 뿐만 아니라 남해 전체가 그렇지.

최승용 : 개통식 할 때는 오셨었어요?

강광수 : 그 때는 4H 그러니깐 농촌 청소년 모임 같은 것이 이리 활성화 되고 할 때 그럴 때 거든. 마을 청년회 들어갈려면 스무살 넘어가야 들고. 그 때 나이 많은 형님들도 계셨지만 4H 가 활성화 될 때가 되어서. 대교 개통할 때 그 때 우리가 풍선 엄청나게 많이 불었어요. 

최승용 : 매일 남해대교를 보시겠네요.

강광수 : 매일 보지 뭐. 눈뜨면 보이니깐. 그런데 그 때만 해도 80년 70년 저런 형식의 다리가 여기 밖에 없었으니깐. 한 20년 동안은 구름떼같이 왔지. 

최승용 : 남해각은 75년에 오픈을 했는데요.

강광수 : 그 때 해태에서 임진각을 운영하고 있을 때고 그 때만 해도 남해 숙박시설이 여인숙 그런 것 밖에 없었으니깐. 2층에 여관 형식으로 되어 있었으니깐.

최승용 : 오픈 했을 때 남해각에는 어떤 시설들이 있었나요?

강광수 : 음료도 팔고 술도 팔고 하는 드라이찐 술도 팔고. 그 다음에 내가 알기로는 양식 식당. 돈까스 같은거. 해태에서 나온 술. 초창기에는 거의 단체손님. 개인 손님은 거의 없고. 관광차 와서 단체숙박하는. 지금 방들이 많이 쪼개져 있지만 옛날에는 30-40명이 동시에 잘 수 있는 그런 방들이 있었거든. 

최승용 : 지하에는 나이트 클럽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강광수 : 오픈 할 때는 없었고. 

최승용 : 남해각은 사람들이 많이 오니깐 해태에서 투자해서 지은 건가요?

강광수 : 그 때 듣기에는 좀 시끄럽기는 시끄러웠지. 그 때도 국립공원으로 되어 있을 때이고. 일반 군민들이나 주민들은 그 당시만 해도 저게 뭐가 들어오는지 신경도 쓰지도 않았고. 국가에서 하는 일이고. 그 때는 이 주변 사람들이 나가서 일해가지고 먹고 사는게 더 바쁜 때이니깐. 요즘처럼 저런 거 들어온다고 의견 개진하고 그런 거는 아예 없었지.

최승용 : 대교 놓기 전에 풍경은 어땠나요?

강광수 : 대교 놓기 전에는 객선 들어왔지. 여객선. 여객선 엔젤호, 비너스. 여수에서 부산가는 일반객선 갑성호, 경복호, 흥한호 그런 배들. 어떻게 보면 그 때가 더 좋았어. 

최승용 : 그 배를 타고 부산을 가시고 그러셨겠네요? 언제 처음으로 부산을 가보셨나요?

강광수 : 초등학교 때. 그 때는 갑성호가 제일 빠른 거거든. 빨라봤자 한 시간이나 삼십분 빠른건데. 6시간 반, 7시간. 갈 때마다 쉬었다 갔으니깐. 삼천포 쉬고 통영 쉬고. 멀미 엄청 많이 했다. 

최승용 : 밥은 어떻게 하나요? 배 안에서.

강광수 : 통영가면 충무김밥. 

최승용 : 그 때는 배로 다 부산으로 왔다갔다 하고. 

강광수 : 그때는 부산으로 남해 분들이 많이 갔지. 그래 놓니깐 대부분 남해 향우들이 부산에 2/3는. 

최승용 : 향우가 한 30만 된다고 하더라고요.

강광수 : 그 때 60년 70년 그 때 굉장히 많이 나갔더라고. 그 때 남해 인구가 13-4만. 그리 하다가 촌에 여기에 남해 농사는 열마지기만 있어도 굉장히 부자라고 했거든. 그런데 보통 경작하는 사람들이 세마지기 네마지기 밭 조금 하고 그래갖고 다 살았는데. 부산 가면 일단 미기 주니깐. 식모로 가거나 아니면 공장이나 일단 그렇게 많이 보냈고. 인척들이 있으면 많이 보내고.

최승용 : 남해가 그 당시에 먹고 살기 힘들었네요.

강광수 : 아이 그 때 힘들었지. 우리도 보면은 우리 형제들이 여럿이 있는데 누님 한 분하고 계시는데 큰 형님이 제일 먼저 그 당시에 할아버지 한테 쪼금 더 아버지 형제들이 다 여기 살았으니깐. 그런데 그 보니깐 할아버지가 아버지 여섯 형제를 낳아놓고 서이만 공부를 시키고 반은 안시키고. 그래갖고 할아버지 돌아가셔서 재산을 나눠주는데. 공부 시킨 아들들은 일을 못하잖아. 촌에 살아도 그러니깐 들논 떼주고. 울 아버지 같이 일하는 아들들은 산에 있는 논 떼주고. 일을 잘 하니깐. 그런데 줘도. 요즘 우리 생각으로는 난리가 나는 일인데. 그 때 어른들은 아버지 말이라면. 

최승용 : 그러면 선생님의 아버님도 농사꾼이었고. 그러면은 형님들은 도시로 다 나가셨나요?

강광수 : 형님들도 동생들도. 어머니가 상처를 하고 재혼을 해서 와서 3형제를 놓고. 위에 배다른 형님이 둘 계시고. 그 당시 일제 강점기 때 중학교 까지 나왔으니깐. 엘리트 였었지. 일본도 쫌 있었고. 이리 온게 어머니도 자식이 둘이 있었고 했으니깐. 이쪽 아버지가 아들하나 딸하나 있었는데 아들을 대학까지 보냈어. 큰 형이 돌아가셨는데 그 당시 서울대 나오셨어. 김영삼 대통령과 같이 학교를 다녔다고 들었는데. 그 당시 노량에 보따리 장사들 약장사도 오고. 그때 굉장히 많이 왔거든. 꿀 같은 거도 팔러 들어오고. 아마 그런 사람들을 구한다고 해 놓으니깐 어머니는 오셨던 모양이야. 아버지하고 상대도 안되는데. 아버지는 일자 무식이고 나이도 있고 그랬는데. 울 어머니는 그때만 해도 바느질도 잘했고 용돈은 벌어서. 일은 잘 못해도. 그래도 아버지가 힘들어도 자식들 공부는 시킬라고 노력을 많이 하셨어요. 어머니가 올해 3월 달에 돌아가셨는데 내가 몇십 년 같이 생활을 해놓으니깐. 어머니 돌아가실 때 상여는 꼭 메고 하고 싶더라고. 동네분들 부탁을 해서 그렇게 했어요. 동네 청년들이 있으니깐. 덕신에 소리 해주시는 분이 있어서 그 분한테 하고.

최승용 : 요즘 상여 멨다는 이야기는 잘 못들어 봤어요.

강광수 : 그리 힘들지는 않아요. 옛날보다 더 쉽지. 마을에 목상여 조립해가지고. 쪼금 살만한 사람들은 공동묘지 안 갔거든. 그러니깐 쪼금이라도 자기 땅 있는 분들은 공동묘지는 잘 안갔지. 우리동네는 보면은. 우리 동네 같은 경우는 공동묘지가 생긴지가 오래 됐고. 바다에서 밀려오시는 분들 저기에 많이 묻었거든. 객사 하셨던 분들. 그러니깐 산소가 전부 다 산속에 다 있는기라. 

최승용 : 73년도만 해도 남해 사람들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이었나요?

강광수 : 읍 빼고. 어머니 이야기 들어오면 우리 마을은 거지는 없었어. 잘 살지는 못하지만 여기 대교 생기기 전부터 객선이 왔다갔다 해고 하동하고 남해 연결하는 나룻배가 왔다갔다 했고. 짐도 옮겨주고 용돈정도는 벌 수 있는. 그래서 오래 살지는 못했다. 동네에 몇 백년씩 자리를 잡고 사는 사람은 없어도. 우리 마을에는 진짜 농사가 없거든. 그러니깐 집도 다 조그마하고 평수 보면은 대략 5-60평 내에 집 지어서 사는 곳이 많았고. 내가 57년생인데 지금 거꾸로 보면 젊을 때 10-20대 지금 같이 있던 분들이 이사를 가거나 돌아가시거나 동네 인구가 거의 반이나 그리 된 것 같아. 30-40분이 떠나신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긴 들어왔지만은. 그때만 해도 동네 한 100가구 그리 살았는데 지금 가구수 한 80가구도 채 안되고. 세대수는 그것보다 많다고 하지만. 뒷골목은 한 사람 죽으면은 집이 하나 빈다고 그러는데 1인 가구들이니깐. 남해 전체 실정이 그러지.

최승용 : 노량마을은 주 수입원이 무엇이었을까요?

강광수 : 대교 생기고 나서부터는 전부 영업. 대교 생기기 전에는 60년 70년에는 10가구 이상이 장사를 다녔다고. 밖으로. 배타고 보따리 장수. 동네 분 한 분이 대구 서문시장에서 비단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떼와가지고 강원도 춘천 그 쪽 인근 촌으로 가서 많이 팔고. 그 때는 결혼 할려면 부모들이 사전에 준비를 다 해 놓고. 그래 가지고 다 그렇게 살았지. 그때 촌에서 논 댓마지기 지어도 매상하지 않으면 돈이 생길 때가 없으니깐. 곡식이 모자라도 매상을 하고 그래야 자식들 한 학기 학비라도 줄 수 있으니깐. 

최승용 : 여기는 바다일은 없어요?

강광수 : 한 두어 분 계셨는데 특별히. 

최승용 : 노량은 주 업으로 상업행위를 많이 했네요. 

강광수 : 대교 생기고 나서 그랬고 그 전에는 자가 농사 하는 사람들 애들 많고 그래도 농사 세 마지기 네 마지기 나락농사 짓고 이모작 보리심고 밭떼기 조금 있고 고구마 심고 하면은 그래도 1년 살았거든. 집집마다 돼지 한 마리씩 다 키웠고. 우리 동네는 양잠을 좀 했고. 일년에 2 번 봄에 가을에 하고 그러니깐. 그런 거 갖고 새끼 키우고 먹고 살고 그랬지. 기본 교육은 받아도 고등교육은 우리 후배들부터 많이 받았지. 우리들 까지는. 

최승용 : 사모님도 남해 분이세요? 노량?

강광수 : 읍 내금. 중매해서 보름만에 결혼했다.

최승용 : 남해대교가 놓여지고 관광객이 물밀 듯이 들어오리라고는 노량마을 사람들은 상상도 못했겠네요.

강광수 : 상상도 못했지. 대교 놓고 나면은 이쪽 사람들은 손님 떨어지고 굶어 죽을 거라고 집 내놓은 사람도 있었어. 그 때만 해도 관광 그런 거는 개념이 없었고. 배 다닐 때에는 남해는 교통이 불편하니깐. 바깥에 사람이 이리로 놀러 올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한거지. 그 때는 객선이라 스쳐지나가는.

최승용 : 근데 대교를 놓고 나서 상상도 못하게 어마어마하게 온거죠.

강광수 : 지금 거꾸로 생각하면 많이 안와야 되는건데. 그때 너무 편하게 돈을 다 벌었거든. 그때는 거의 가정집에 있는 사람도 타월같은 것도 팔러 나오고. 마을에 도매상이 있어가지고. 책받침, 연필, 볼펜, 액자 그러니깐. 뭐 살기가 너무 편하게 된거지. 그리고 주변에 가게라도 가지고 있던 사람은 떼돈 벌었지. 그 친구들 이야기 들어오면 고액권이 없었으니깐. 보통 천원짜리 백원짜리 소액권 가지고 많아 봤자 오천원 만원 이랬으니깐. 이 사람들 건어물하고 그런 사람들 계산이 안되잖아. 돈을 포대에 넣어가지고 집에가서 계산하고. 그리 했다고 하더라구. 그 밑에서 자란 자식들은 거기서 조금 가져가도 모르고. 그런 시기를 십몇 년 했으니깐. 그때만 해도 계속 그리 될 줄 알았지. 

최승용 : 남해각 자체에 놀러오는 사람도 있었나요?

강광수 : 남해각은 그 때 해태가 관광까지 같이 해태관광이라고 차가 있었어. 그 친구들 들어오는 것만 해도 자기들은 별 걱정 안 하고 장사를 했지. 단체숙박하고. 

강광수 : 남해각 오픈하고 나서 서빙하는 아가씨들 전부 서울에서 내려왔거든. 촌 사람들 보기에 그 친구들 얼마나 신선해. 2층에 방이 다 있어도 손님들 다 내주고 밑에 촌집을 얻어서 다 밑에와서 잤어. 그래서 마을 우리하고도 잘 지내고 그랬지. 

최승용 : 이 지역 사람들은 일하기 어려웠나요?

강광수 : 한 1년 2년 있다가 지방 사람도 쓰기 시작했지. 우리 동네 아가씨들도 거기에 일을 하고 그쪽 직원들하고 인연이되어 결혼해서 올라간 사람도 있고. 

최승용 : 선생님도 남해각 가서 밥도 먹고 그랬었나요?

강광수 : 그 때 우리는 드라이진 먹으러 갔지. 촌에는 생소한. 

최승용 : 남해각이 이름이 변한 적은 없나요?

강광수 : 처음에 해태에서 했고, 진주 대아고등학교 이사장한테 넘어 갔다가. 거기서 박종한 사장한테 넘어갔다가 지금 사장한테 최철민 넘어갔다가 남해군이 하고.

최승용 : 해태에서 어쨌든 안되어서 민간에게 넘어 갔겠죠?

강광수 : 한 참 잘 되고 꺽일 시기가 되어서 이 관광이 계속 변하고 있다 아이가. 

최승용 : 대아고등학교 이사장님은 고쳐서 사용 했나요?

강광수 : 박물관 비슷하게 했지. 유물 전시관 같이. 도자기도 있고. 그 분은 아마 그리 할려고 매입을 한 것 같고. 

최승용 : 손님이 끊기기 시작한 시점은 언제인가요?

강광수 : 90년대 초? 근데 어느 관광지도 한 20년 지나면 손님이 끊기지 않을까. 문제는 투자를 너무 많이 한거지. 건물을 다 높이 지었지. 김두관 군수 할 때에 군에서는 충렬사 때문에 30채 가까이를 이주시키려다 보니깐 그 중에 장사하는 집이 6집. 나머지는 민가. 상가 하는 사람들 이주 시킬려고 하니깐. 장소를 들어오는 로타리. 충렬사 넘어서 설천 가는 길 이주 시키는 안. 마지막에 이 앞을 매립해서 이주시키는 안. 이 분들이 양쪽으로 모두 안 갈라고 했고. 어쩔 수 없이 앞을 매립을 했지. 옛날 해안선이 훨씬 좋고 그랬는데. 그 때 군에서는 다 2층으로 해가지고 밑에하고 2층 일부 해서 60평이니깐 그런식으로 기본계획을 했는데 그 때만 해도 관광차가 좀 많이 올때니깐. 단체 관광객이 많이 올 때니깐. 앞에 집들은 다 단층집이고 그러니 이 분들이 좀 너르게 하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버스 3대 정도를 한꺼번에 받을 수 있게 다 지은기라. 너무 많은 손님을 받으려고 계획을 하다 보니깐 지금은 골치가 아프지. 그 때는 뭐 또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 지금은 단층만 이용하기에도. 건물 지어놓으면 관리비 들어가고 2층 하려면 사람들 써야 하고. 

주민들이 지금 힘든거야 사실이지만 어떻게 보면 굉장히 많은 혜택을 보고 살아왔거든. 아직 거기에 안주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아직까지도 노량은 가격이 비싸다는 이미지가 그렇고. 근데 실제 가보면 그렇지 않은데. 우선 그렇게 좀 개선이 되고. 지역 자체의 소비가 상당히 많으니깐. 노인들이 쓰는 돈들이 많아요. 그런 걸 어떻게 유치시킬 수 있는 방안을 스스로 강구해야 하는데. 안타깝지. 관광객들도 그렇지만 지방 사람들이라도 먹으면 유지는 되거든. 나중에 관광객들 오면 수입이 되고. 노량 그나마 손님 들어오는게 충렬사랑 거북선인데. 산꼭대기 가도 횟집 있는데. 여기만의 특화가 있어야지. 군에서 뭐 해서 효과를 관객을 만들어 주겠어요. 2,000억 들여 노량대교 만들어도 별 효과가 없는데. 기본적으로 영업 하시는 분이 노력하지 않으면 변화가 어렵다. 그리고 뭐 바깥에 나가면 그 좋게 만들어 놓은 시설도 텅텅 비어가지고 지금 관광 오시는 분들이 저런걸 안 좋아해. 관광이야 계속 바뀌는 거니깐. 그 뒤에는 체험 하는거 뭐 그렇고 지금은 뭐 개인적으로 와서 혼자 느끼고 가려고 하고. 

최승용 : 매립한 게 결과적으로 좋지 않게 된거네요.

강광수 : 여기 다섯 집 있던 장삿집이 스무 집이 되버렸잖아. 그런 게 좀 서로. 근데 행정에서 해줄 수 있는 게 한계가 있는 것이고. 뒤쪽으로 이주 했으면 동네도 좀 넓어지고 지금보다 나아졌을 거라 보지.

강광수 : 건어물, 기념품. 그 때는 기념품 가게가 댓게 있었지. 그 때는 어른들 책받침이라도 하나 사고 타월이라도 하나 사고 액자도 하나 사고. 

최승용 : 남해 관광오면 코스가?

강광수 : 남해대교 한 번 걸어보고 내려와서 밥먹고 충렬사. 금산. 그 때는 금산 많이 갔지. 지금은 뒤쪽으로 길이 나 있어서 그렇지 옛날에는 상주 앞에서 전부 걸어 올라 갔지.

최승용 : 한 번씩 도회지로 나가시죠? 올 때 남해대교 보이면 집에 왔구나 하는 마음이 드시겠네요.

강광수 : 지금도 바깥에 여행 갔다가 들어올 때 대교만 보여도 반갑지. 남해대교는 고향 같은 다리. 남해대교만 보여도. 남해각을 리모델링해서 전시관 같은 걸 만들면 외지인들은 일부 왔다가 들리는 분도 계시겠지만 여기 남해인들 50만 지역민, 향우들도 들릴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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