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최재석 님

이름. 최재석

일시. 2019년 11월 16일

장소. 이동면 난음마을 최재석님 댁

참석자. 최재석, 최승용(헤테로토피아 책임연구원), 서성경(헤테로토피아 연구보조원), 문가형(헤테로토피아 객원 연구원)

 

최재석 : 이게 그 때 88올림픽때 성화봉송하는 걸 배가 지나갈 때, 그 때 찍은 건데. 이걸 내가 어렵게 부탁해서 찍어서 갖고 있는거지

최승용 : 여기에 불이 있었나요?

최재석 : 예, 성화가 통과할 때에

최승용 : 아 성화봉송을 배로?

최재석 : 여수 쪽으로 갈 때에, 이거는 하동 쪽에서 보고 찍은 거지. 지금 틀리지, 여기 건물이 많이 섰지만 그 때 당시에는 이래되어 있었지 매립도 많이하고 건물도 많이 섰잖아

최승용 : 성화봉송이 여기로 지나간다고 남해 군민들이 나와서 

최재석 : 통영에서 와서 삼천포를 경유해서 여수가는 거라

최승용 : 이 사진은 어떻게 입수를 하신거세요

최재석 : 이거는 그때 당시에 성화봉송이 지나간다해서 남해사진관에 우리 친구 이종민이 그 친구한테 부탁해서 그 친구를 데리고. 촬영으로 기념으로 남기고 싶다해서 가자. 그래서 유일하게 하나밖에 없어. 지금. 자기도 그 때 나도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집에 보관해 둘걸 이래하더만. 나 하나밖에 없어. 그래서 오랫동안 놔뒀지

최승용 : 이 때 성화봉송을 배로 이렇게?

최재석 : 보트가 삼천포에서 남해로 지나간다고 방송을 하더라고 그래서 남해사람들이 막 나가고. 구경한다고

최승용 : 이게 어디서 불이 시작됐을까요?

최재석 : 여하튼 부산에서 출발했다 하더라고. 그 때 전국을 돌았거든, 성화봉송이. 

최승용 : 어르신은 이 시간을 미리 듣고 찍으러 간거네요? 친구데리고?

최재석 : 응, 친구데리고

최승용 : 그럼 이 때 8월 30일이예요?

최재석 : 응, 친구가 날짜까지 그렇게 넣어서 주대

최승용 : 어르신은 이 때는 뭐하셨어요? 농사 짓고 계셨나요?

최재석 : 아니 그 때는 내가 회사다니고 있었지. 지금 한국농어촌공사지. 그 때 당시는 농업기반공사라 했나. 그 때 근무할 때거든

최승용 : 원래 이런 거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최재석 : 한 때는 성냥갑

최승용 : 성냥갑? 그걸 모으셨어요?

최재석 : 모으다가, 한 20년 동안 모았는데 그걸 우리 아들한테 뺏겼어. 우표 수집도 한 동안 했거든. 이거는 기념으로 하나 만든거. 

최승용 : 그 때 올림픽한다고 국기를 다 달았네요

최재석 : 응, 그 때 그랬어

최승용 : 어르신은 남해를 떠난 적은 없으세요? 

최재석 : 없어. 그 때 와서

최승용 : 어디서 태어나셨어요?

최재석 : 나는 여기서 태어났고, 객지생활을 하고 81년도에 들어왔지. 부산에 있었지. 서울에 무역회사에서도 있었고. 그러다가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내가 시골로 들어왔지. 

최승용 : 들어와서 한 일이 농업기반공사에 취직하신건가요?

최재석 : 한 2년 쉬었다가 농업기반공사에 시험쳐서 들어갔지. 내가 86년 4월 1일 부로 들어왔지. 26년 근무하고 2008년도 그 때 내가 퇴직을 했지. 명예퇴직을.

최승용 : 남해에서 중고등학교를 다 나오셨나요?

최재석 : 아니 중학교만 여기서 나오고 고등학교는 부산에 그 때 당시 야반도주해서. 남해서 안 보내줄라해서 그 때 당시 밤배가 다녔는데, 다리가 없으니까. 8시간 밤배를 타고 부산가서 경남 상고를 쳐서 합격이 됐는데 돈이 없다고 안 보내줬어. 그래서 다시 해광고등학교 거기 다녀서 졸업을 했지.

최승용 : 그러면 아버님이 고등학교 갈 필요없다, 농사 지어라 그런 건가요?

최재석 : 그 당시는 생활이 어려워서. 여기서 중학교 안 나온 사람들도 부지기수라. 우리 친구들 중에서. 나는 부산에 고등학교 들어가기 참 힘들었거든, 남해서. 그런데 우리 담임선생님이 너는 갈 수 있다, 한번 해봐라 해서 했더니 합격이 됐더라고. 선생님은 가라그러고 집에서는 안 보내줄라하고. 

최승용 : 해광고등학교가서 학비는 어떻게 하셨어요?

최재석 : 그 때는 큰 형님이. 내가 6남매 중에 제일 막내거든. 그 때 큰 형님이 부산에 계셔서 다 해줬지.

최승용 : 큰 형님 집에서 산거예요?

최재석 : 응 집에서

최승용 : 큰 형님은 결혼하셨었고?

최재석 : 그 때는 결혼했지. 형님이 40살

최승용 : 엄청 차이가 많이 나네요

최재석 : 하모. 제일 큰 형님이고 내가 제일 막내고. 아버지뻘이지

최승용 : 6남매 중에 막내세요? 

최재석 : 응. 6남 1녀 인데 내 밑에 여동생이 하나있어. 서울 살다가 나이 들어서 귀농을 해라 해서 하는데. 오늘 금송에 안착을 해서 집 짓는다고 거기 한 번 가볼라고

최승용 : 고등학교는 거기서 마치시고 바로 취업을 하신건가요?

최재석 : 졸업하고 울산에 현대중공업에 취업을 해서. 그 때 당시 내가 들어갈때만 해도 현대중공업 근로자가 3만명이었지. 나는 그 때 정주영 명예회장을 몰랐지. 현장에서 그 분이 돌다가 나하고 팔씨름 한 번 하라 그러더라고. 막걸리를 걸고. 한 번하고, 그 분이 일부러 져주는 거 같애. 사기를 높여 줄려고. 그 날 저녁 막걸리 한 말 먹었지. 그 때 당시 막걸리 값 돈 1만원 할텐데 봉투에 10만원 넣어 주더라고. 그래서 그날 저녁에 조원들 데리고 나가서 같이 파티도 하고. 그 때 내가 검사부에 QC라고 배 다만들면 안에 들어가서 검사를 해야되거든.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빨간 분필을 가지고 체크하고 재공사하고. 그래서 울산 현대중공업에 있다가 3년 동안 근무하다가 서울에 무역회사 대연통상이라고 생산공장에 총무로 5년 근무하다가 어머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버님 혼자 시골에 계시면 안 된다해서 81년도에 내려왔지.

최승용 : 이 당시에 어르신 나이는 어느 정도..

최재석 : 그 때가 보자..

최승용 : 몇 년생이세요?

최재석 : 50년생. 올 해가 70이거든. 한 마흔 되었나? 

최승용 : 어르신의 아버님은 몇 세셨어요?

최재석 : 93에 돌아가셨지. 1909년생인가

최승용 : 돌아오셨을 때도 아버님 나이가 꽤 많으셨네요. 

최재석 : 예 많았죠. 그래도 우리 아버님은 힘이 좋아서 내보다 더. 아버님이 밖에서 풀 베어서 지게 지고 오면 내가 그걸 못 받았어. 무거워서.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 병원 한 번 안가셨다. 

최승용 : 아버님을 모시러 들어오신거네요?

최재석 : 예

최승용 : 사모님이랑 같이?

최재석 : 예. 아버님은 객지로 절대 안 나간다하니, 형제들이 모여서 의논을 한 게 돌아가면서 3년씩 시골 들어와서 모시기로 하자, 그럼 제일 먼저 누가 들어와서 살래. 형님들은 자녀들이 다 학교에 들어가 있으니 못 빼오잖아. 내가 애도 없고 제일 몸이 가벼웠거든. 그래서 내가 먼저 모실게요 하고 무역회사가 사표를 안 받아줘서 몰래 내고 내려왔지. 내가 사표낸지 2달 만에 회사에서 사표 수리한다고 올라오라고 그랬어. 2달 만에 올라가서 정식으로 짐챙겨오고 그랬지. 그 때 3년 모신다한 게 눌러 앉아버렸지. 

최승용 : 사모님은 반대 안 했어요?

최재석 : 우리 집사람은 제일 처음 내가 시골에 들어가자하니 자기가 먼저 들어가자 그러더라고. 자기도 시골에서 살고 싶고 아버님 모시고 산다고. 자기는 아버님을 봐서 들어가야 한다고. 그래서 지금까지 살고, 잘들어왔다 그러지.

최승용 : 근데 아버님이 들어오실 때 뭐먹고 사냐는 

최재석 : 그 때 우리집에는, 지금도 내가 짓고 있는 농사가 6,000평이거든. 그래서 그 때 당시는 형제간 의논할 때 누구든지 시골 들어가서 사는 사람이 아버님이 논밭은 다 준다, 아버님이 형제간들 다 모아놓고 이의가 있나없나. 그 때 당시 특별조치법이 있었거든, 그래서 5년 만에 나도 모르게 아버님이 손수 전부 다 내 앞으로 이전 등기 다 하고. 그 때 당시는 2,000평 밖에 없었어. 형님들이 또 막내인데 고생한다고 1,000평 사주고 이래가 모은 게 6,000평이라.

최승용 : 막내한테 줬네요.

최재석 : 응. 이 집은 지금도 내가 살고 있지만 벌써 집을 지어서 나갈라고 해도 아버님 손때가 묻은 게 되서 차마 이걸 버릴 수가 없어서. 불편해도 내가 조금 고쳐서 살지. 그래서 이 집만큼은 내가 막내라도 집 차지 안 하겠다. 장손이 있으니까 줘야할 거 아니냐, 내가 지금은 아버님, 어머님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나도 나이들면 언젠가는 끝날 때 되면은 우리 아들한테 할아버지 제사를 물려 줄 수 없으니까. 장손이 지내야되니까, 그 때는 장손이 집을 차지하고 팔지마라, 보조하고 제사를 지내라. 장손한테 줄려고 해도 안 받을라 그래. 지금도 아버님 명의로 되어있어.

최승용 : 들어오셔서 농사를 짓다가? 

최재석 : 짓다가 농사에 개혁을 해봐야 되겠다 해서 한 게. 그래서 마늘 작목회 이동면 회장을 맡아서 하다가 홍삼마늘이라는 신품종을 제주도에서 기술을 배우고 종자를 가져왔어. 그래서 지금 현재까지 남해군 마늘 연합회 회장 하고 있는, 3년째 하고 있는데 너무 힘들어서. 근데 18년도에 정부에서 대한뉴스에서 상을 2개를 받았어. 자랑스러운 한국인 상, 대한민국 베스트 인물 대상. 안에 상패가 있거든. 그걸 받고 나니까 딱 못 내려 놓겠더라고. 덫에 걸린거야. 지금까지 맡아 하고 있는데 너무 힘들어. 

최승용 : 남해대교를 자주 가셨나요?

최재석 : 자주 갔지. 근데 이거 진짜 잘못 됐어요.

최승용 : 뭐가 잘못 됐어요?

최재석 : 남해대교를 남해군에서 만들자고 해서 만든거거든. 노량다리를 하자고 할 때 할 거 아니가, 머할라고 제2라는 말을 붙여서. 지금 노량대교는 돌은 우리가 두드렸는데 게는 하동이 잡았다아니가. 그리고 노량대교 지나서 남해로 들어오는 길이 잘못됐어. 그래서 지금도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잘못됐다 하는데. 애시 당초 여기로 놓는 게 아니고 동흥쪽으로 놓으려고 했는데 갑작스럽게 변해가지고 더 그리됐다. 남해대교는 사실은 최치환의원이 모든 거 다 만들어 놓고 완공은 신동관의원이. 사실은 최치환씨가 다 한거야. 그 뒤에 국회의원이 신동관씨가 되서 이 다리를 완공한 거거든. 이 다리를 놓고나서 박정희 대통령이 남해 내려왔다이가. 대교가 참 유서가 깊은 다린데 이게 요즘 새로 다리를 놓는 바람에 이미지가 죽어가잖아. 내가 그게 안타까운 거야.

최승용 : 어르신은 여기 지날 때 마다 어떤 생각이 드세요?

최재석 :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내가 개통할 때 갔다왔거든. 내가 그 때는 이 다리를 지나갈 때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잘 놓은 다리라 그랬거든. 지금도 다리를 보면은 옛날 그 분 말씀이 생각나지. 우리나라도 이렇게 토목기술이 세계 어디 내놔도 잘한다 이렇게 발전했다. 우리 사람이 이렇게 만들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최승용 : 그러면 도시에 있다가 하동 쪽에서 들어오잖아요. 그럼 다리 보이면 남해사람은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런다는데..

최재석 : 그렇지. 전국에서 다리보러 얼마나 많이 왔네. 다리 하나 보러 왔거든. 이 다리를 하다보니 남해금산이 좋아졌고 상주가 관광객이 늘어나고 그렇게 된거지. 남해대교로 남해군에 관광지라는 것이 이미지가 좋아졌지. 그러다보니 실제로 창선연륙교가 생기니 관광객들이 삼천포로 오니까, 케이블카 놓으니까 돈은 삼천포사람이 다 벌이네? 남해는 지금 관광객이 많이 줄어 들었지. 남해와서 돈을 써야되는데 구경만하고 가니까.

최승용 : 남해각에는 가보셨어요?

최재석 : 남해각 참 좋았거든. 위에 여관을 했거든. 밑에 커피집도 하고 기념품도 팔고. 사람이 북적북적했어. 지금 남해각도 그걸 자꾸 보완해서, 시대가 변하는 대로 리모델링을 해야되는데 그걸 안 하다보니까 사람들이 별로 안 찾잖아. 새로 꾸민다고 하대? 벌써 했어야 돼. 내가 볼 때는. 오는 손님들이 불편없이 쉬어갈 수 있는. 차라리 옥상에 전망대를 해놓고 올라가서 파라솔에 차도 한잔 마시고, 간단한 맥주도 한 잔 마시고. 내가 그 때 당시 김두관 군수때 번지점프를 한다고 그랬다고. 그래서 내가 갔어. 한번 뛰어 내리고 싶다. 2만원 달라하대? 주고 갔는데 내를 묶더니 근데 내가 그때 술을 한 잔 했거든. 그러니까 술드셨어요? 그래. 한 잔 딱 했다 했는데 안돼요 해서 못 뛰어내렸어. 지금도 내가 볼 때 여기도 번지점프를 할 수 있는 걸 해 놓으면 그런 걸 보고라도 관광객이 오지 않겠느냐. 남해각에서 짚라인 이런 거라도 만들어 놔야한다. 남해 금산 케이블카도 상주에서 놔서 올라가게 해야 되지. 지금도 우리 이야기하는 게 유배문학관. 그건 노도로 가야해. 노도에 초가집 해놓고 막걸리팔고 파전도 팔고. 벽련에서부터 노도까지 출렁다리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걸어서 가도록 만들고.

최승용 : 이 때 여기서 팔던 기념품은 기억나세요?

최재석 : 남해대교 다리 모양을 만들었어. 기념품으로 많이 팔고, 여러가지가 있는데 거북선도 만들어서 팔았던 기억이 나. 손수건도 남해대교 그림을 그려서 팔고 그랬다고. 지금 찾을래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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