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김정곤 님


이름. 김정곤

일시. 2019년 11월 16일

장소. 남해읍 신흥아파트 경로당

참석자. 김정곤, 최승용(헤테로토피아 책임연구원), 서성경(헤테로토피아 연구보조원)

 

김정곤 : 내가 사진이 두장 있어서, 이거는 우리 집사람하고 나하고 찍은거고 이거는 조카를 내가 업고..

최승용 : 이 때가 대략 몇 년도 일까요?

김정곤 : 72년도 개통할 때,

최승용 : 아 개통하기 전인가 보네요?

김정곤 : 개통하고 난 후에지

최승용 : 시기적으로 보면?

김정곤 : 여름이지, 내가 반팔로 입었으니까

최승용 : 이날은 남해대교를 한번 구경하러 가신건가요?

김정곤 : 그렇지, 집사람하고 부산에서 조카가 와서 내가 조카를 콩발을 해가서 사진을 찍고 그랬죠.

최승용 : 그러면 혹시 어르신이 몇 년생이실까요?

김정곤 : 47년

최승용 : 원래 이 마을 출신이세요?

김정곤 : 내 원래 집은 동산인데 여기 살러온 거는 한 30년 됐어요. 신흥아파트에

최승용 : 이때는 연세가 어떻게 되셨을까요?

김정곤 : 마흔다섯?

최승용 : 옆에 사모님이세요? 

김정곤 : 예 집사람이고, 

최승용 : 여기는 부산에서 온 조카?

김정곤 : 예, 이거는 남해각 있는 거기서 아마 찍었나싶으고

최승용 : 개통식할 때 가보셨어요?

김정곤 : 박정희 대통령 오실 때 기억이, 왜냐하면 내가 72년도에 군에서 제대를 했거든. 제대를 하고 와가지고 그날 개통식하는 날 갔다가. 개통하기전에 내가 걸어왔어요. 제대하면서 신노량에서 타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서 개통하기 전에 내가 건너왔거든.

최승용 : 사다리를 탔다는 말은 어디를 사다리를 탔다는 건가요?

김정곤 : 하동 노량에서 자기네들이 공사하면서 올라가려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하는데 그 당시에는 크레인이 없으니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어요. 올라가서 내가 남해대교를 걸었어요.

최승용 : 개통하기 전에?

김정곤 : 예, 개통할 때는 박정희 대통령 오실 때 우리가 가서 구경도 하고 그랬어요

최승용 : 그 때 풍경이 기억나세요?

김정곤 : 응 기억나지 

최승용 : 사람이 엄청 많이 왔다던데

김정곤 : 많이 왔죠, 다리가 흔들렸는데? 그래서 중단을 시켰어. 가지말라고. 양쪽에서. 남해쪽에서도 막고 하동쪽에서도 막고. 개통은 어떻게 했냐면은 헬기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오셔가지고 다리입구에서 걸어서 들어오는걸 그때 최치환 국회의원 박익주, 신동관. 박익주는 뒤고 신동관하고 최치환씨하고 세 사람이 같이 걸어왔거든요.

최승용 : 그러면 남해대교를 구경하러 종종 가보신건가요?

김정곤 : 그렇죠. 우리는 상징이 남해를, 동남아에서는 일본 다음에 한국에서 남해대교 아입니까? 그렇죠? 전국에서 왔거든, 그 당시에는. 내가 관광차를 남흥여객에서 19년을 운전을 했어요. 내가 남흥여객에 25년 일하고 83년 1월 16일날 들어와서 내가 2007년 5월말부로 퇴직을 했거든. 25년 근무를 하고. 그러니까 우리는 거기로 매일 건너다녔지. 83년도 부터는. 

최승용 : 남흥여객에는 관광차도 있었어요?

김정곤 : 84년도부터 관광차가 5대 있다가 10대까지 불어났거든. 84년도에 내가 관광차를 했거든.

최승용 : 남흥여객에서 여행사처럼 운영을 한거에요?

김정곤 : 그렇지. 남해여객에 관광차 10대, 남흥여객에 10대 있을 때, 5대가 우선 먼저 인가가 10대가 되야 인가가 나거든. 5대는 우리가 먼저 가져오고. 차츰차츰 늘어난기 10대까지 늘어났지. 

최승용 : 남흥여객이 일반 시내버스 운영도 했지만 관광버스도?

김정곤 : 별도로 있었어요. 남흥 관광 여행사라고

최승용 : 이거를 운전하신거세요?

김정곤 : 예

최승용 : 그러면 남흥 관광 여행사로 해서 관광차가 10대 정도 있었고 거기 운전원으로 근무를 하신거에요? 

김정곤 : 예

최승용 : 그럼 관광차만 25년을 모신거세요?

김정곤 : 아니죠. 내가 19년을 했지. 왜냐하면 남흥여객하고 남해여객하고 합해가 하면서 남해여객에서 관광차가 없어져버렸어. 남흥여객에서 인수를 했거든. 남해여객이 망해가지고, 인수를 할 때 없어지기 때문에 이거 있어봐야 안된다 해서 그 때 화전관광도 생기고 생기사니까 골치아프다 해가지고 정진우가 없애삐자해서 남흥관광이 없어진기.. 7년 내가 여객버스를 타다가 마지막 졸업을 했지. 

최승용 : 그 버스를 여객버스라 부르나보네요? 관광버스 아닌거는?

김정곤 : 예

최승용 : 남해읍이나 군내 다니는 거랑 서울 다니는 거

김정곤 : 주로 서울을 다녔지

최승용 : 대교 있기 전에도 밖으로 나가보셨어요? 다리없을 때?

김정곤 : 다리없을 때는 있었지. 왜냐면 우리 군에 갈때는 어데서 가냐면 선소로 해가지고 배가 삼천포로 해가지고 삼천포에서 버스타고 어데로 가냐면 창원으로, 내가 창원 39사단에서 훈련받으러 갔거든. 그 당시에 대교가 생기기전에는 어떻게 됐냐하면 우리도 버스가 노량에서 도선을타고 하동노량에 내리면은 거기서 출발해가지고 진교로 해서 곤양으로 해서 완사로 해가지고 진주로 해서 마산으로 해가지고 부산으로 갔거든. 

최승용 : 대략 소요시간이 어느 정도 걸렸을까요?

김정곤 : 그 당시 8시간, 왜냐하면 배도 8시간이고 버스가 2시간 단축된 기 그 당시 포장이 없어. 비포장 도로라. 펑크를 해버리면은 8시간 걸리고 보통 한 6시간 이 정도 보면 돼. 우리가 첫 들어간기 사상.

최승용 : 그러면 펑크 나는 것까지 각오를 하고?

김정곤 : 그렇지, 그러니까 보통 몇시간 걸립니까 손님이 물어보면 넉넉잡아 8시간, 왜냐하면 남해에서 출발해서 손님을 태워가면 진교도 가면 태워야되고, 부산가니까, 또 진교에서 완사로 거쳐서 진주가는 사람도 태우고 진주터미널에 들어갔다가 경유를 해가지고 마산 들어갔다가 가고. 그러다보니까 8시간 8시간 반, 잘 가는 사람은 6시간 반. 

최승용 : 그러면 이 정도 걸리면 식사도 해야되겠네요.

김정곤 : 중간에 어떻게 하느냐하면 마산홈에 들어가면 315탑있는 거기, 근데 거기가면 10분내지 15분을 주는거야,

최승용 : 좀 오래 쉬네요.

김정곤 : 배차시간이 그래되니까, 그 시간에 가서 5분 내지 10분 안에 안내하고 먹어야 해. 서서 그냥 인정사정없이 먹고 이빨 닦을 시간도 없이 바로 물 먹고 출발해야 돼. 그 당시는 다 어려운 운전을 했지.

최승용 : 식당이 따로 있어요? 

김정곤 : 없어

최승용 : 그럼 일반 식당에 가서?

김정곤 : 일반 식당에 가서 그냥 밥주세요 해서 빨리 나오는거 먹고 나서는거지

최승용 : 아까 말한 게 안내양?

김정곤 : 안내양이 있었거든 그 당시는

최승용 : 안내양이 계속 타고 다녀요? 같이?

김정곤 : 그렇지. 그 당시에는 여성애들이 있어가지고 나이 많은 사람들 짐도 짐칸에 실어줘야되고 부축도 해야되고 펑크나면 같이 도와도 줘야되고. 그 때는 앞에도 있었고 뒤에도 있었어. 뒤에는 남자, 앞에는 여자. 그게 왜냐하면 그게 조수라 그러는데 펑크나면 걔네들이 같이 거들어주고 차 고장나면 내하고 같이 고쳐가지고 출발하고 그랬었거든. 한 차에 세사람타고 다녔지.

최승용 : 기사 한 분, 안내양 두 분?

김정곤 : 안내양 하나, 뒤에 남자 조수라하지

최승용 : 그럼 이렇게 셋이서 가서 밥을 얼른 먹는 거네요?

김정곤 : 어, 그거는 식비는 회사에서 주는기고

최승용 : 먹는 곳이 주로 마산?

김정곤 : 그게 시간별로 틀려, 아침에 나가면 마산가서 먹어야되고 오후에 가는 사람들은 진주나 가서 점심을 먹어야되고

최승용 : 그럼 이때는 10-15분씩 쉬는 거고요? 그럼 승객들은 어떻게 하나요?

김정곤 : 승객들도 같이 소변보러 가고 그 때 소변보고. 지금 우리가 서울가면 대전 경유해가는 거 있지? 손님받는 시간에 휴게실 안들어가고 손님받는 시간에 소변보고 서울로 올라가는 그 식이지.

최승용 : 손님들도 이 때 식사를 할 수도 있고?

김정곤 : 식사는 자기네들이 알아서 빵이나 우유 사다먹고, 김밥 사다먹고 그랬지

최승용 : 근데 뒤에 조수, 앞에 안내양 이 사람 심심하겠는데요?

김정곤 : 걔네들은 그럴 수 밖에 없지, 누워자는 거지, 안내양은 자지를 못하고 그 당시에는. 요즘에는 리어라해서 앞에서 문을 열고 내리지만 그 당시에는 앞에서 타면 뒤로 내렸거든. 젊은 사람들은 점프를 해서 뒤로 내리고 나이많은 사람들은 앞으로 내리고

최승용 : 운전하는 기사님이 수리기술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어야 됐겠네요?

김정곤 : 그렇지 우리는 옛날에 면허시험을 칠때는 구조학, 법규, 실기시험이 있었거든. 66년 7월 30일날 면허증을 냈거든.

최승용 : 어떻게 정확히 기억하세요?

김정곤 :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앞으로 마이카 시대가 온다, 우리 손으로 운전을 할 줄 알아야된다 그럴 때 내가 부산에 내가 있을 때 크라운맥주회사 부산 대리점에 있었거든. 영업판촉사원으로 있었는데 그 당시 차가 뭐냐하면 일본에서 폐차되는 산넨시아 오토바이라고 세 발짜리 바닥이 훤히 보이는 거야. 그걸 타고 내가 운전을 배웠는데 그래서 재미가 있더라고. 앞으로 시대는 마이카 시대다. 언젠가는 우리가 운전을 배워가지고 차를 끌고 다녀야된다. 그래가지고 내가 영도에 가면 경남학원이라고 자동차학원이 있어. 저녁으로 거기가서 공부를 하는거지. 시험이 그 당시는 법규학 100문제, 구조학이 100문제

최승용 : 100문제요?

김정곤 : 어, 그 다음에 일반상식, 거기서 80점을 받아야 돼. 3과목 다. 80점 안받으면 학가를 주지 않았어. 

최승용 : 근데 그게 지금은 1종이 있고 2종이 있고

김정곤 : 그 당시는 그냥 보통 1종이라. 1종이면 택시하고. 그 당시 대형면허는 있었는지 내가 모르겠어. 대형면허 있어야 버스를 몰 수 있엇거든. 내가 대형면허 낸거는 72년 제대하고 와가지고 12월 20일인가 냈거든. 남해에서도 대형면허 내가 빠른 택이지. 일반 면허를 가지고 군에를 가니까 손들어라 하니까 한 400명중에 세 사람이 나왔더라. 면허가 참 힘들었지. 부산에 한번 시험쳐서 떨어지면 6개월 있다가 경상남도로 와야 돼. 경상남도에서는 부산 한 번, 경남 한 번. 두 번 밖에 없었어. 그러니까 부산에서 떨어지면 6개월 있다가 경남에 와서 시험을 쳐가 또 떨어지면 또 부산에 가야되고. 그래도 내는 운좋게 한번에 다돼가지고 그 당시는 실기시험은 광안리 해수욕장 백사장에서 우리가 시험을 쳤거든.

최승용 : 아 실기시험이요?

김정곤 : 어 실기시험을. 지금 사람들은 그 때 이야기하면 까마득히 모르지. 

최승용 : 면허 시험장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요? 

김정곤 : 어 없었어. 거기서 대나무를 갖다 꽂아놓고, 십자로 꽂아, 꽂아 놓고서는 앞으로 들어가가지고 빠져나와가지고 또 뒤로갔다가 이래가 빠져나가고 그게 합격이야, 대나무 안거치면은. 에스코스도 없었어. 딱 십자코스에 합격하면 되는 거야. 그 때 차는 뭐냐, 군용 다찌차, 지금 같으면은 이과이분의 일톤, 2톤반 차. 

최승용 : 트럭이네요

김정곤 : 트럭가지고 했지

최승용 : 그러면 실기연습을 어떻게 하세요

김정곤 : 실기연습은 거기가서 몇 번 왔다갔다 해보라는 거지, 차를 갖다가 놔놓고. 내가 오늘 시험 날이라하며 한 번씩 해보라는 거야.

최승용 : 시험치기 전에?

김정곤 : 어어

최승용 : 면허를 딸 수 있는 학원은 없으니까 시험장만 있는거에요?

김정곤 : 시험장만 있는 거지. 그거는 경찰서서 나와서 하는 거라. 그런데 많이 봐줬어. 들어갔다가 나무만 안거치면 무조건 합격. 봉을 거치면은 넘기고 이러면 불합격 시키고. 넓어 또. 요즘같이 공식이 빡빡한 게 아니고 무조건 들어가서 나무 안거치고 이래 빠져나와삐면 합격이라

최승용 : 필기가 관건이네요.

김정곤 : 필기가 제일. 그러니까 내가 장 이야기 하는 기 지금 면허내주는 자체가 너무 무능해. 내가 생각할 때. 왜그러냐하면은 지금 펑크나면 타이어 못 빼, 불러야 해. 그 당시 우리가 전부 다 펑크나면 도로가에서 교체를 해서 가고 이랬거든. 엔진이 고장나면 우리가 손을 봐야 돼. 고쳐가지고 출발해야 돼. 그러니까 요즘 그렇게 하는 학원이 없어. 

최승용 : 이 때 기름은 어디서 넣었나요? 주유소가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버스가 6-8시간 갈려면 기름을 넣어야할텐데

김정곤 : 남해서 출발할 때 가득 채우는 거야. 모지라는 건 스페어곽이 있어, 지금은 말통이지만 그 당시 군용 스페어곽 그걸 부산갈 수 있는 4통 내지 6통 싣고 가는 거야. 가다가 부어야 해, 조수가 가서 부어야 돼.

최승용 : 한 3-4통을 챙겨서 가는 거

김정곤 : 또 부산서 가득 넣고 오면은 중간에 모지라면 우리가 또 부어가지고 들어오고 그랬거든. 

최승용 : 그런데 인터뷰하다보니까 그 당시 버스타고 부산에 가면은 머리같은 데 모래먼지가 한 가득 앉았다고 그러던데, 그거는 문을 열어놔서 그런가요?

김정곤 : 에어컨이 없으니까, 창문을 열다보면 비포장 도로에서는 우리차만 가는 게 아니고 상대방 차가 오면 먼지가 나고 이랬었거든. 그러니까 뒤에 가는 사람 머리가 하얬다는 먼지가 앉았다는 그 말이 맞아. 

최승용 : 겨울에는 춥잖아요?

김정곤 : 겨울에 추워도 할 수 없지, 달달달 떠는 거지. 그기 80년도에 브라타라고 나왔어. 지금 같으면 보일러 같은 게 있어. 기름을 넣어서 뜨신 바람이 나오면 차안에 파이프를 대가지고 따뜻하게 해주는데, 남해에서 있을 때는, 시장 바구니가 전화선을 꼬아서 만든 강주리가 있었어. 그걸 파이프 위에 얹어 놓으면 뭐가 타는 내가 나. 주인은 몰라. 우리는 냄새를 맡고 ‘뒤에 머가 탑니다, 함 차라보세요’ 하고 보니까 고기가 익고 있어. 

최승용 : 아 시장 봐 온 물고기가?

김정곤 : 어어, 남해에서도 상주해수욕장, 미조를 가면 뒤에는 진짜 먼지를 둘러 써. 그 당시는 사람이 86년도 87년도 이럴 때는 마산에서도 상주해수욕장 오고 여수에서도 오고 그러니까 사람이 많으니까 입석을 시켜서 가잖아. 더우니까. 그럴 때 윈도우가, 앞에 유리가 풀면은 앞으로 들리게 되어있어. 앞을 들면 바람을 바로 맞아서 시원한데 상대편 먼지가 오면 싹 다 둘러써. 시원하기는 시원한데 먼지가 앉아서 얼굴이 하얘가지고

최승용 : 주행 중에 열리는 거에요?

김정곤 : 아니 우리가 열어줘야 돼. 그 당시 또 밑에는 보면 기사들 발 시원하라고 문이 또 있어. 그 문 열면 여성분들이 앞에 타면 치마입은 사람은 팬티가 보여. 젊은 아가씨들이고 학생들은 아는 사람은 시원하니까 거기 가서 앉는다고. 

최승용 : 근데 장거리를 많이 뛰셨나보네요

김정곤 : 우리는 주로 완행버스를 1년 타고 전부 장거리를 다니고 서울노선 나왔을 때 남해에서 8시간 걸렸어. 눈이나 오고 하면 내가 최고 오래 걸린 게 48시간 30분. 그 당시 한남대교에서 출발해가지고 왔는데 한남대교 건너는데 1시간 반 걸렸어. 그 때 출발할 때 아가씨들보고 물 좀 먹지 말고 음료수 먹지 말아라 그런데 말 안들어. 여자분들은 많이 참아야 3시간이야, 그때는 죽어. 그런데 눈이 왔다? 할머니들 이런 사람들은 엉덩이가 보여도 상관없는데, 아가씨들은 안 보여준다고 안 누는거야. 내가 우산을 들고 다니거든 차에. 그럼 안내양보고 가서 우산으로 가려주고 소변을 누게 해라, 이래도 아가씨가 부끄럽다고 안 가는 거야. 그럼 차를 출발해 간다? 그럼 딱 백미러로 보면 상이 노란거야. 소변은 보고 싶은데 말은 못하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가로 붙이는 거지. 그럼 안내양보고 가서 우산 펴주고 잠바 벗어서 가려줘라 하면 결국 소변을 봐. 그 때는 길거리에 우리 차만 그런 게 아니고 전부 다 그런거야. 할 수 없어 생리적으로. 그러니까 나는 방송을 해요. 여러분, 이 분이 남해서 서울 오시다 보니 물이 바뀌다 보니까 배탈이 났다, 이해를 해달라, 똑같은 입장이다. 그러면 손님들은 말 안 해. 그 때 우리는 항상  두루마리 화장지하고 우산을 필히 가져다니지. 터미널에 도착하니까 그 분 남편이 담배를 한 보루 사 주고 가더라고. 고맙다고. 그래서 내가 한번 방송 탄 예가 있어. 그 당시에

최승용 : 남해대교에 관광객이 엄청났죠?

김정곤 : 그렇지, 그 당시는 전라남북도에 소문이 어떻게 났냐하면 남해대교를 세번을 왕복을 안하면 저승을 못 간다 해서 엄청나게 사람이 밀려왔지. 노량에 횟집에 대박났지. 그 당시에 손님을 못 쳐낼 정도로 왔지. 남해서 여관은 노량에 없고 읍에 신풍여관, 남해여관, 여관 3개인가 있었어. 여인숙은 5개 정도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공무원들이 출장와서 배가 시간이 늦고 차시간이 없으면 못가니까 여관에서 자고 가고 그랬는데

최승용 : 선생님은 남해에서 태어나신거죠?

김정곤 : 예

최승용 : 태어나서 군대갔다와서 부산에서 잠깐?

김정곤 : 부산을 중학교 졸업하고.. 그 때는 단기로 쓰거든. 단기를 빼버리고 보면 1964년도 부산서 생활하다가 군대 갔다 와서 또 남해서 1년 있다가, 남해대교 개통하고 난 뒤 택시를 했었거든. 남해택시를. 택시할 때 손님 태워가지고 밥먹으러 대교까지 왔다갔다 구경시켜주고 들어가고 그랬는데. 그러고 있다가 우리 머스마를 74년도에 낳아가지고 78년도에 부산에 내려갔지.

최승용 : 그 때는 부산에서 직장 구하러?

김정곤 : 응 직장 구하러. 남해에서 할 게 없으니까. 그 당시는 남해에서 운전기사 아니면 할 게 없었어. 농사짓는 거 외에는. 공장이 있나, 가내공업 할 것도 없고. 참 빈약했지. 그러니까 대도시로 나갈 수 밖에 없는기라. 우리는  운전기술로 가지고 있으니까 부산을 갔는데, 그 당시 시외버스가 충무 로타리에 있었는데, 80만원 받았었거든, 트럭을 해서. 3년 했었나. 80만원 같으면 그 당시 경찰서장, 군수들이 40만원 받았어. 우리는 배를 받았지. 농담으로 군수 월급 우리 기사 월급보다 작은 것들이 까불고 있어 그래샀는데. 그러고 있다가 내가 자가용을 갔는데. 그 당시 120만원씩 받았었거든. 지금 같으면 1200만원정도. 한달에 그리 받은 거지. 그 당시에 기사했다하면 여자들이 시집오려고 줄을 서 있었다니까. 월급이 많으니까,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잖아. 무식해도. 66년도 부터 사상에 코로나 택시, 그때부터 일본에서 기술을 박정희 대통령이 가져와서 그 택시이름이 새마을 택시야. 새마을 차라고 해서 신진에서 신진자동차라해서 나왔지.

최승용 : 그럼 남해로 돌아온 년도가 

김정곤 : 돌아온기 83년도 1월 16일날 회사에 입사하면서. 집사람하고 얘들은 부산에 있었고 내 몸만 왔었지. 와 있다가 하도 전무님이 이주를 하라해가지고 애들 데리고 와서 보니까 내가 애들 교육은 빵점을 시켰어. 왜? 부산에 둬야하는데, 내 노는 날 한 달에 한 번 노는데, 이틀이나 삼일 노는데 거기 갔다올라하면 피곤하니까 전무가 안 된다 가지마라 옮겨라해서. 그 당시 내 친구 중에 선생하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 우리 머스마가 머리가 좋았었거든, 애를 남해 가지말고 부산서 교육을 시켜라 했는데 결국 내가 안된다, 합치자 해서 오다보니까. 우리 머시마가 외삼촌 밑에서 삼단 복식 빼기더하기를 배웠는거야, 이 선생은 그걸 못하는 거야. 그러니까 지가 풀고 답이 나오니까 지가 모르는 걸 풀고 있거든? 선생이 그 때부터 애를 미워하기 시작한 거야. 손을 들어도 발언을 안시키고. 그러고 있다가 두 달 되니까 남해서 공부 못 하겠다고 부산으로 보내달라 한 거야. 그때 보내줬어야 해. 내가 안 보내준 게 후회스러운데. 

최승용 : 그러면 남해로 와서 지금까지 줄곧?

김정곤 : 예

최승용 : 지금은 은퇴를 하신거고. 그래도 고향와서 사시네요. 

김정곤 : 오히려 부산사는 것보다 공기 좋고 여기가 좋지. 내 고향이 좋지.

최승용 : 한 번씩 나갈 일은 있으세요? 남해를 벗어날 일이?

김정곤 : 많지. 내가 11인승 봉고차가 있어서 놀러가자고 하면 몇 사람씩 놀러도 다니고. 요즘에는 네비가 있으니까 찾아가기 수월하지만 우리 관광갈 때는 네비도 없지 이정표 보고, 지도 보고 찾아가는 거야. 가다가 모르면은 아이고 손님들 죄송합니다, 차가 이상이 있는 갑습니다, 타이어 펑크났는지 확인합니다 하고 지나가는 사람 잡아서 어디로 들어가면 됩니까 하면 잘못 왔다고 해서 차를 돌려가지고 나올 때는 어떻게 이야기하냐 면은 아이 길이 공사한다고 못 가니까 여기서 돌려서 나가야 됩니다 하고 찾아가. 그런 어려움이 있었어. 

최승용 : 남해 나가셨다가 들어오실 때 남해대교 보면 어떤 마음이 드세요?

김정곤 : 장 마음은 내 고향에 왔다. 밖에 나갈 때는 남해대교를 벗어나서 떠난다 기분 좋게 남해를 떠난다 고 들어올 때는 다리가 딱 보이면 ‘아 남해대교다! 우리 고향왔다.’그 때부터 안도를 하는 거지. 우리집에 왔다. 내 뿐만 아니라 손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땐 불이나 켰나, 그냥 벌건게 딱 보일 때 보면 감회롭지. 

최승용 : 사람들이 제보해 준 사진들로 남해각에 전시도 하고 사연들을 모아가지고 짤막한 만화도 만들거든요. 그 때 선생님이 말해주신 것들이 조금조금씩 요소가 들어가 있을 거에요. 

김정곤 : 사진이 많이 있었는데 찾아보니 이 2개 밖에 없더라고. 그래서 이거라도, 나라도 이런 게 있어야 전시관이 모양이 있지 않느냐. 왜냐면 내가 관광을 하다보니까 손님을 모시고 가면 그 지역에 박물관 같은 데 가면 소재가 많아야 아 이렇구나 하는데 소재가 짧으면 이게 무슨 박물관이고 너무 초라하다 이 소리가 나기때문에 단 사진 2장이라도 보탬이 될까 싶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최승용 : 좋습니다. 남해대교에서 찍은 사진은 남해사람이라면 다 가지고 있는데 그게 별거아니다 생각을 하고 제보를 잘 안 하시더라고요. 저희는 이런 거 하나하나가 소중한데 그런 게 아쉽더라고요.

김정곤 : 주위에 사진있거든 제보를 해라, 남해를 살리라면은. 우리 모임에도 가면 이런 이야길 해요. 이제 가면 난 사진줬다 가면 이럴거야. 

최승용 : 이게 진짜 중요한 제보가 되거든요. 이게 전에는 회색칠해졌던 사진도 있더라고요.

김정곤 : 예 한 동안. 그게 뭐냐하면 아폴로 달나라 갈 때 그 회색 색깔이 탈색이 안 된다 해서 바꾼 적이 있어요. 아폴로 몇 호이지 모르겠어. 우주갈 때 색을 한다해가지고 한동안 했지. 그래도 색깔은 빨간 게 낫다해서 다시 교체를 했지. 

최승용 : 빨간 거는 색이 바래니까? 회색으로하면 안 바래니까?

김정곤 : 예, 안 바랜다 이래가지고

최승용 : 그런데 다시 바꿨네요?

김정곤 : 예, 처음에는 빨간건데 그 당시 참 산뜻하고 멋이 있었거든. 그런데 색을 바꾼거는 우주에 가도 괞찬은 색이라해서 바꿨는데 몇 년 있다가 보니까 그것도 탈색이 되니까 다시 빨간 거로 하자 이래가지고 빨간 거로 했지.

최승용 : 들어보니까 개통하고도 그 당시 차가 많이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김정곤 : 예, 가끔. 우리 시간 버스 가는 거, 진주가는 거 마산, 부산, 여수, 순천 그 버스 외에는 트럭들 좀 다니고 그 당시 자가용은 남해읍에 금회당 약방 윤윤재씨가 올드 코티나를 가지고 있었어.

최승용 : 그걸 기억하세요?

김정곤 : 예, 내가 며칠 운전을 했거든. 내가 신동관씨 모시고 부산 해운대에 지관을 모시러 가 가지고. 광안리 수영 비행장에 모시고 해운대가서 뭐 보고 비행기 태워 보내고 나는 다시 남해로 왔지. 그래서 남해는 자가용 가지고 있는 사람은 윤윤재 한 사람 있었어.

최승용 : 그걸 빌려서 갔다 오신 거에요?

김정곤 : 예, 그 때가 72년 10월이다. 그 당시는 군수도 차가 없었어요. 군수도 급하면 윤재차를 타고 다닌거지. 그러고나서 정부에서 차가 지원이 나와서 참 그때만해도 남해군이 빈약했지.  

최승용 : 대교 놓은 이후로 발전이 확 된 건가요?

김정곤 : 예, 대교가 놓인 뒤로부터 군수차도 나오고. 내가 83년도 남해오니까 대형 면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어. 마이클 버스 타는 사람들은 다 보통 1종 가지고 타고 다니더라고 

최승용 : 안잡아요?

김정곤 : 그래도 남해경찰서에서 안 잡았지. 대형면허 내라 내라 말만 했지 단속은 안 했어.

최승용 : 남해각에는 놀러 가보셨어요?

김정곤 : 갔지. 신동관씨가 해태, 지금 롯데지. 해태가 망하면서 롯데로 간거야. 그 때 해태상이 양쪽에 있었는데 없어져버렸어. 그런 걸 놔 뒀어야 되는데. 그러고 난 뒤에 밑에 나이트 클럽이 있었는데, 반지하에, 우리가 손님 모시고 관광 갔다 오면 거기 대놓고 1시간에서 2시간씩 노는 거야. 맥주 먹으면서. 기분 풀이하고 거기서 놀다가 집에 가자 해서 오고. 그 당시는 관광을 가면 12시되면 집에 도착하고 그랬어. 

최승용 : 밤 12시요?

김정곤 : 밤 12시. 그러면 우리는 뒷 날 또 나가야 돼. 잠을 겨우 4-5시간 밖에 못 자는 거지. 해태가 있는 그 앞에서 찍은 그런 사진도 있을 거에요. 

최승용 : 그러면 나이트클럽에서 1시간 놀고 남해로 들어오는 거에요?

김정곤 : 들어오지. 거의 젊은 사람들은 기본적이고. 

최승용 : 그 때 들어보니 앞에 검문소? 차가 나가는 걸 잡기도 하고 그랬다던데

김정곤 : 그 때는 검문소에서 예를 들어 강도가 나타났다, 간첩이 나타났다 하면 일일이 서가지고 신분증 확인하고 그리 통과를 보냈거든. 사고가 없으면 그냥 통과를 했었는데, 사건이 생겨서 비상이 걸리면 무조건 거기서 서서 일일이 신분증 확인 다하고 그리 보냈지. 

최승용 : 버스도?

김정곤 : 버스도

최승용 : 그러면 나갈 수가 없겠네요. 거기서 다 잡으니까

김정곤 : 그러니까 그 당시는 남해대교가 서기 전에는 도둑이 없었다 했거든 남해군이. 왜? 배를 안 건너주면 갈 수가 없거든. 노량 창선 서상에서 여수 세 군데서 배를 안 건너면 남해를 빠져나갈 수가 없어. 그러니까 도둑질해봐야 잡히니까. 대문도 그 때 필요 없었어. 그렇게 살았는데 삭막해진 거는 남해 상주해수욕장에 많이 번창을 하면서부터 외지에서 온 도둑놈이 들어오는 거야, 촌집 털고. 그 당시 은행이 별로 없고 마을 금고, 새마을 금고, 군단위 농협이니까. 금융이 별로 없으니까. 돈이 있으면 집에 농 밑에 넣어 놓는 거지. 도둑놈들이 그걸 알고 농을 뒤져가지고 돈을 가져가버리거든. 남해가 홍도나 울릉도같이 도둑이 없었어. 모든 게 남해대교가 생김으로 해서 발전이 된거지. 실질적으로 보면

최승용 : 남해 사람들은 남해대교에 고마워하겠네요

김정곤 : 고마워하지.

최승용 : 저희가 이정도로 인터뷰 마무리하고 이거는 남해각 닷컴이라고 홈페이지가 있습니다. 거기에 가면 이런 사연들과 사진들이 일차적으로 모이고 있거든. 선생님 사진도 올라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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